한때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는 ‘피노 누아는 곧 부르고뉴’라는 인식이 당연했다. 완벽한 자연조건과 1000년 넘게 전해온 노하우로 쌓아 올린 명성이었다.
하지만 시간과 기술, 와인 메이커들의 끝없는 도전을 바탕으로 이 공식도 깨지고 있다. 미국을 필두로 뉴질랜드, 칠레, 호주 등 신대륙 와인이 꽃을 피우면서 각 산지의 개성을 그대로 흡수한 피노 누아들이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프랑스 부르고뉴는 피노 누아가 탄생한 곳이자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 생산지다. 자연적 조건부터 피노 누아에 최적화한 지역이다. 석회질, 점토, 이회암으로 구성된 토양은 피노 누아가 우아하고 섬세한 향을 품고 자라나도록 한다.
서늘한 기후도 피노 누아의 생육에 잘 맞는다.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고급 와인 산지 중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다. 언덕 지형이어서 춥고 긴 겨울과 서리가 잦은 봄에도 포도나무가 바람과 서리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일조량이 많은 여름도 포도 숙성에 안성맞춤이다.
토양과 해의 방향, 바람 등 미세한 특성에 따라 체스판처럼 세심하게 나뉜 100여 개 포도밭은 테루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피노 누아 재배 기술의 극치다. 가장 안정적으로 최고 품종의 피노 누아를 생산한다는 코트 드 뉘의 그랑크뤼 라 로마네는 0.8㏊에 불과하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와인 산지다.
미국은 20세기 중후반부터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와인을 앞세워 명실상부한 와인 강자로 떠올랐다. ‘악마의 품종’ 피노 누아에 도전하는 와인 생산자가 늘어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들은 수년간 실험과 연구개발을 거쳐 피노 누아를 심기 적당한 곳을 찾아냈다. 발효 기술을 업그레이드해 고급 피노 누아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캘리포니아는 대부분 지역이 따뜻해 피노 누아를 재배하기에 부적합하다. 하지만 해안가 산맥 안쪽에 낮고 넓게 펼쳐진 지대는 찬 캘리포니아 해류의 영향으로 서늘한 기후가 유지된다.
일조량이 많은 지역에 석회질의 토양, 해안가의 냉각 효과까지 더해지자 고품질의 우아한 피노 누아를 생산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만들어졌다. 몬터레이, 소노마 카운티, 샌타바버라 카운티 등이 대표적인 피노 누아 명산지다. 전반적으로 부르고뉴보다 색상이 진하고 과일의 풍미가 더욱 부드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캘리포니아 위에 있는 오리건은 ‘미국의 부르고뉴’라 불리는 곳이다. 토양의 구성은 다르지만, 부르고뉴보다 서늘하고 맑은 기후 속에서 피노 누아의 가벼운 풍미와 섬세한 향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와인을 생산한다.
그중에서도 윌래밋 밸리는 도멘 드루앵, 루이 자도 등 부르고뉴의 유명 생산자들도 일찌감치 둥지를 튼 지역이다. 위아래로 240㎞에 이르는 윌래밋 밸리는 포도원별로 개성 있는 다양한 피노 누아를 선보이고 있다.
뉴질랜드는 천혜의 기후로 피노 누아 재배에 탁월한 조건을 갖췄다. 특히 서늘한 남섬에 자리한 센트럴 오타고 지역은 부르고뉴와 비슷한 테루아로 ‘남반구의 부르고뉴’란 별명을 얻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피노 누아는 탄탄한 질감과 생기 있는 과실 풍미, 신선함을 강조하는 산도 등 전반적으로 균형이 잘 맞춰진 것으로 평가된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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