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스트리트의 대형 은행인 씨티그룹이 스페인의 휴양지 말라가에 사무실을 열었다. 지중해를 따라 펼쳐지는 13㎞ 길이의 해변과 화창한 날씨로 유명한 말라가를 무대로 씨티그룹이 파격적인 ‘인사 실험’에 나섰다는 평가다.
1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씨티그룹의 신입 애널리스트 27명이 이날부터 말라가 허브에서 업무를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이 말라가에서 근무하는 2년 동안 주 5일에 하루 8시간 근무가 보장된다. 대신 월가에서 일하는 신입 연봉(10만~11만달러)의 절반을 급여로 받게 된다. 이들은 EMEA(유럽, 중동 아프리카) 지역 투자은행(IB) 부서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씨티그룹의 말라가 허브는 월가 역사상 유례없는 근무 형태라는 평가다. 월가의 주요 은행들은 직원들에게 고연봉을 지급하는 대신 노동강도 역시 혹독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해 초에는 미국 은행 골드만삭스의 신입 직원들이 “업무 과중으로 주말 휴식 없이 1주일에 100시간 이상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고 반발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골드만삭스 사태 이후 월가 은행 대다수는 급여를 올려주는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씨티그룹의 말라가 허브처럼 이른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보장을 대안으로 제시한 사례는 전무하다.
씨티그룹은 말라가 허브를 통해 최적의 인사·노무관리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월가 은행들이 주니어 뱅커 부족에 시달리는 가운데 고액 연봉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해서다. 마놀로 팔코 씨티그룹 글로벌 IB 공동대표는 “‘워라밸’을 보장하면 인재 유출을 막을 수 있을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말라가 허브를 총괄하는 마리아 디아즈 델 리오 전무는 “위기를 맞았을 때 신입 채용을 대폭 줄이는 ‘실수’를 저지르면, 시장이 회복될 때 일손이 매우 부족해진다”며 주니어 뱅커 인력 유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말라가 허브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더 오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창의성도 풍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정한 인재라면 미국 뉴욕과 같은 금융 중심지에서 일하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직원의 이력에 말라가 허브 근무 이력이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는 우려도 일고 있다.
말라가 허브에서 평생 일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씨티그룹은 말라가에서 우수한 성과를 낸 사람들에게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등 세계 금융의 중심지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직책에 지원할 자격을 주기로 했다. 팔코 공동대표는 “경력을 충분히 쌓으려면 최종적으로는 말라가 허브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씨티그룹이 말라가 허브 채용공고를 내자 지원자 3000명 이상이 몰리며 100대 1 이상의 치열한 경쟁률을 기록했다. 최종 채용된 27명 대다수는 25세 이하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