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미술관에 가야만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출근길에 만나는 조형물, 업무차 들른 호텔에 걸린 그림, 아이 손을 잡고 찾은 백화점에 놓인 조각 중에는 유명 미술관의 한자리를 차지할 만큼 좋은 작품이 많습니다. ‘걷다가 예술’은 이렇게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을 찾아갑니다.
국내 설치 미술계는 꼭 20년 전인 ‘2002년 여름’을 달군 최대 이벤트를 ‘한·일 월드컵’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설치미술품이자, 그때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설치미술을 일반 국민에게 알려준 대작이 바로 이때 데뷔해서다.
주인공은 서울 광화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해머링 맨’. 흥국생명빌딩 앞에 서 있는 높이 22m, 무게 50t짜리 거인 얘기다. 강철과 알루미늄으로 만든 이 조형물은 오른손에 망치를 든 채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35초마다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망치질을 한다.
해머링 맨의 ‘아버지’는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조너선 보롭스키(80·사진)다. 1942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는 37세가 되던 해 뉴욕에서 연 개인전에서 높이 3.4m짜리 사람 모양 나무 조각을 내놨다. 작품의 이름은 ‘노동자(Worker)’.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거인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튀니지 출신 구두 수선공이 망치질하는 모습을 스케치해 작품을 디자인했다. 보롭스키는 건설현장의 막노동꾼과 청소부, 구두 수선공 등 육체 노동자는 자신과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손과 몸을 써서 작업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게 노동을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던 그는 이후 작품 재료를 강철과 알루미늄으로 바꿨다. 그러면서 작품명도 해머링 맨으로 바꿔 달았다.
광화문에 서 있는 해머링 맨은 혼자가 아니다. 전 세계에 ‘형제’가 있다. 보롭스키는 1985년 미국 텍사스를 시작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위스 바젤, 일본 나고야 등 세계 곳곳에 11명의 해머링 맨을 남겼다. 광화문 해머링 맨은 일곱 번째다. 아시아 국가 중에선 최초다.
광화문 해머링 맨은 조금 특별한 존재다. 일단 형제들 중에서 가장 크다. 키 22m로, 프랑크푸르트(21m)나 시애틀(14.6m)에 있는 형제들을 내려본다. 망치질 속도도 제일 빠르다. 당초 1분17초 간격으로 망치질하도록 설계했지만, ‘너무 느리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35초 간격으로 좁혔다. 이를 두고 “한국에 사는 해머링 맨답게 ‘빨리빨리’ 문화도 배운 것 아니냐”는 농담이 돌았다.
광화문 해머링 맨에 대한 보롭스키의 애정도 남달랐다. 당시 해외 작가들의 조형물은 그 나라에서 만든 뒤 한국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보롭스키는 이 작품을 한국에서 제작토록 했고, 틈날 때마다 방한해 제작 과정을 꼼꼼히 챙겼다.
이 대목에서 생기는 궁금증 하나. 보롭스키는 왜 세계 곳곳에 이런 거대한 조형물을 만든 걸까. 그의 설명은 이렇다. “원래 작품명(노동자)에서 알 수 있듯이 해머링 맨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해머링 맨이 반복적으로 망치질을 하는 모습은 쉴 새 없이 일하는 현대인을 뜻한다. 삶의 무게(망치를 든 오른팔만 4t)가 만만치 않지만, 그는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한다.”
실제 해머링 맨의 일상은 우리와 비슷하다. 해머링 맨은 직장인이 출근하는 오전 8시에 망치질을 시작한다. 퇴근 무렵인 오후 7시가 되면 망치질을 멈춘다. 겨울(11~2월)엔 1시간 앞당겨 오후 6시에 ‘퇴근’한다. 하루 10~11시간 동안 1000번 넘게 망치질을 하는 셈이다. 주말과 공휴일, 노동절(5월 1일)에 쉬는 것도 일반 직장인과 비슷하다. 계속 망치질을 할 수 있도록 1년에 24번 ‘건강검진’도 받는다. 연간 유지보수 비용만 7000만원이 든다.
지난 20년 동안 해머링 맨이 ‘휴가’를 간 것은 석 달뿐이다. 2015년 노후 부품 교체 때 두 달 멈춘 것과 2020년 정기검진으로 한 달 쉰 게 전부다. 해머링 맨을 운영·관리하는 태광그룹 관계자는 “20년 근속인 만큼 직장인으로 치면 부장급 연차”라고 했다.
해머링 맨은 단순하고, 지루한 망치질을 20년째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이런 그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 직장인이 많다. 이게 바로 보롭스키가 건네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닐까. “매일 똑같은 일상에도 지치지 않고 숭고한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현대인이여, 힘내라!”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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