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의 수중으로 넘어갔던 동북부 하르키우주 일대를 잇따라 탈환했다. 러시아군의 사기가 떨어진데다 우크라이나군의 기만작전까지 통하면서 200일을 맞은 전쟁의 판세가 흔들리고 있다. 자존심을 구긴 러시아가 평화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크지 않은 만큼 전쟁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러시아 침공 200일째인 11일(현지시간)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 총사령관은 텔레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군은 이달 들어 3000㎢가 넘는 지역을 탈환했다"고 밝혔다. 이는 우리나라 서울 면적(약 605㎢)의 5배에 달한다. CNN 등 외신은 "지난 4월 이후 러시아군이 점령한 지역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되찾은 것"이라면서 "6개월 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수성한 이래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러시아군은 지난 10일 하르키우주에서 사실상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철수' 대신 '부대 재편성'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우크라이나군의 거침없는 공세에 밀려 점령지를 포기하는 것으로 풀이됐다. 러시아군이 떠난 곳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과 인접한 군수 보급 기지인 이지움과 바라클리아다. 잘루즈니 총사령관은 "우리는 하르키우 지역에서 남쪽과 동쪽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면서 "주 경계에 도달하기까지 50㎞가 남았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남부 도시 헤르손 수복에 나설 것"이란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러시아군이 남부 전선을 지키기 위해 하르키우 병력을 헤르손으로 이동시킨 사이 우크라이나군은 전열이 흐트러진 러시아군을 공격했다. 사기가 떨어진 러시아군은 저항 없이 점령지를 돌려준 것으로 전해졌다. 런던왕립연합서비스연구소의 지상전 선임 연구원인 잭 와틀링은 "러시아군의 사기는 매우 낮다"면서 "이들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우크라이나군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은 퇴각 와중에도 하르키우 화력발전소에 보복 공격을 가했다. 발전소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하르키우와 도네츠크주 전역은 이날 한때 전력 공급이 끊기는 피해를 입었다. 발전소 직원도 한 명 사망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민간인을 겨냥한 의도적인 미사일 공격"이라며 맹비난했다.
러시아가 점령한 유럽 최대 원자력발전소인 우크라이나 남부 자포리자 원전도 이날 가동이 전면 중단됐다. 원전 인근에서 이어지는 교전으로 방사능 누출 우려가 커지자 우크라이나는 마지막 원자로인 6호기를 전력망에서 차단했다.
낙승을 거둘 것이란 예상과 달리 러시아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전쟁 찬성파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지자인 람잔 카디로프 체첸 자치공화국 수장은 러시아군의 하르키우 철수 결정과 관련해 "그들이 실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꼬집었다. 러시아 내부에선 점령지를 지키지 못한 지휘부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러시아군이 수세에 몰렸지만 전쟁은 이어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CNN은 "굴욕적인 평화협정 대신 공세를 지속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전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