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에 부릅뜬 눈, 힘이 잔뜩 들어간 말투,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떨리는 목소리, 헛웃음이 나게 하는 엉뚱한 질문까지 지난해 'SNL 코리아'에서 선보인 인턴기자의 모습은 사회초년생들의 마음을 건드리며 '주기자'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주기자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그려낸 이는 베테랑 배우가 아닌, 신인 주현영이었다. 주기자 외에도 각종 성대모사를 자유자재로 소화해낸 그는 데뷔 2년 만에 대중에 이름 세 글자를 제대로 각인시켰다. 신조어를 쏟아내며 Z세대의 취향을 저격하는가 하면,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인 김건희 여사까지 똑같이 따라 하니 단숨에 세대를 초월한 '핫스타'로 부상했다.
희극 연기로만 이미지가 굳어질까 걱정될 법한 상황이긴 했다. 실제로 앞서 정상훈, 김민교, 권혁수, 김슬기 등 'SNL' 출신 배우들을 코미디언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였다.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를 만난 주현영은 주기자를 완벽하게 벗고, 동그라미로 새로 태어나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드라마는 ENA라는 이름마저 생소한 채널에서 시청률 17.5%라는 기적을 일으키며 인기리에 종영했다. 주현영은 극 중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신입 변호사 우영우(박은빈 분)의 절친 동그라미 역을 연기했다. 괄괄하지만 누구보다 쾌활하고 솔직한 '똘끼' 캐릭터를 그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럽게 표현해냈다는 호평이 따랐다.
'우영우'는 주현영의 첫 정극 연기 도전작이었다. 주현영은 "첫 단추가 잘 끼워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주기자를 했을 때보다 더 다양한 세대가 알아봐 주고, 팬이라고 해주는 게 신기하다"며 "최근에 초밥집에서 '이 집은 연어가 진짜 맛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걸 들은 주방장님이 연어 초밥을 서비스로 더 주시더라. 드라마를 정말 잘 보고 있다면서 동그라미도 언급해줬는데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주현영은 유인식 감독이 콕 찍은 배우였다. 그는 오디션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 감독으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아 '우영우'에 합류했다. 다만 제안받았을 당시엔 동그라미가 자신의 역할인 줄 몰랐다고 했다. 주현영은 "작품에 대한 미팅을 제안받고 감독님을 만났다. 내게 동그라미 역할을 원하는 줄 몰랐다. 대본을 보고도 동그라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랑 너무 다른 성격의 캐릭터였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주현영이 준비해 간 역할은 하윤경이 연기한 최수연 변호사였다. 주현영은 "동그라미는 자연스럽게 연기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수연 변호사 역할을 준비해 대사를 읽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연기를 보더니 동그라미는 어떠냐고 하더라. 대본을 조금 읽었는데 바로 '당신인 것 같다. 현영 씨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마 그때 읽은 부분이 동그라미가 노래 부르며 일하면서 우영우의 첫 재판을 도와주는 첫 신이었을 거다"고 했다.
유 감독은 'SNL 코리아'의 주기자를 보고 주현영을 염두에 뒀다고 했다. 하지만 주현영은 망설였다고. 그는 "동그라미는 나랑 성격이 너무 달랐다. 그런데 감독님은 그렇지 않다더라. 주기자를 보면서 그 안에서 동그라미와 비슷한 부분들을 발견했다면서 그걸 잘 녹여줬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고민하는 그에게 확신을 준 건 유 감독과 문지원 작가였다. 주현영은 "정말 자신 없어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도, 감독님과 작가님이 '현영이는 무조건 할 수 있다'면서 큰 확신을 줬다. 사실 난 배역을 따지고 고려할 입장은 아니었다. 기회도 없었고, 오디션도 늘 떨어지기 일쑤였다. 제안 주신 자체가 감사했고, 또 죄송했다"면서 "전적으로 날 믿어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신 덕에 작품을 선택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시작한 '우영우'는 배움의 장이자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됐다. 박은빈에 대해서는 "바로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선배라서 너무 좋았다"고 했고, 그 밖에 강기영·강태오·하윤경·주종혁 등 타 배우들을 떠올리면서도 "다들 사랑이 많았다. 참 다행이고 행운인 부분이다.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있다"며 애틋함을 드러냈다.
에피소드마다 특별출연한 배우들의 열연에도 크게 감탄했다고. 특히 주현영은 이봉련을 언급하며 "정말 존경한다. 예전에 연극을 보고 선배님을 처음 알게 됐는데 심장이 빨리 뛰어서 주체가 안 되더라. 커튼콜 때 손뼉을 아낌없이 치고 싶어서 사진을 후다닥 찍고 휴대폰을 내려놓을 정도였다"며 "이번에 같은 작품을 했지만 만날 기회가 없어서 아쉽기도 했다. 옆에서 그 연기를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고 했다.
"배우 선배님들뿐만 아니라 작가, 감독님까지 모두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됐어요. 연기적인 고민을 함께해 줄 선배님들부터 숲을 못 보고 나무만 보는 제게 멀리 보는 법을 알려줄 수 있는 작가, 감독님까지 생긴 거죠. 어려움을 겪을 때 언제든 두드려볼 수 있는 동료들, 감독, 작가님이 생겼다는 게 제겐 너무 큰 행운이지 않을까 싶어요."7년가량 피아노를 배우며 자연스럽게 피아니스트가 될 줄 알았던 주현영의 인생이 바뀐 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이었다. 춤추고, 노래하고, 성대모사 하는 게 즐거웠던 그는 돌연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연기를 택한 이유는 단 하나, "가장 짜릿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2019년 단편영화 '내가 그리웠니'로 데뷔해 2년 만에 주기자로 얼굴을 알렸고, '우영우' 동그라미까지 연타 홈런을 치며 성실하게 배우로서의 길을 밟는 중이다.
주현영은 "주기자의 인기는 전혀 예상 못했다. 그냥 연기하는 자체에 행복을 느꼈다. 'SNL' 오디션을 본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붙은 거다. 주기자라는 캐릭터도 너무 재밌어서 한 거다.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한 걱정이나 설렘은 크게 갖지 않았다. 그저 'SNL'에서 만든 주기자라는 콘텐츠를 내 의도대로 잘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반응이 오니까 신기했다. 공감이 주는 힘이 크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희극 배우로 먼저 얼굴을 알린 탓에 동그라미 연기를 앞두고 걱정은 없었는지 묻자 "동그라미를 어색하게 했다가 자칫 주기자가 보여 몰입감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은 있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목소리 톤이나, 표정, 말투 등 철저히 동그라미의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스펙트럼을 더 넓히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주현영은 "춤추고 노래하는 걸 정말 좋아한다. 나중엔 뮤지컬도 해보고 싶다. 대학교에 다니며 뮤지컬 공연을 했는데 그때 무대 위에서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느꼈다"고 했다.
출연하고 싶은 작품으로는 뮤지컬 '빨래'를 꼽으며 "학교 공연에서 멀티걸을 맡았다. 서점 직원부터 진상 손님, 직장인 여성, 할머니, 할머니의 딸까지 나영이만 빼고 다 연기했다. 어렵기도 했지만, 그보단 즐거움이 컸다. '빨래'라는 작품이 주는 울림과 감동이 크다. '우영우'와 결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힐링이 필요한 분들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냐는 물음엔 "공포물을 좋아한다. 현실에서 겪을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배우로서 경험해보고 싶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물을 연기하면서 나도 몰랐던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답했다.
주현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 달릴 예정이다. 쿠팡플레이 '복학생: 학점은 A지만 사랑은 F입니다'를 시작으로 tvN 드라마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 영화 '두시의 데이트'로 또 새로운 '배우 주현영'을 선보인다.
"올해 목표는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는 거예요. 주기자, 동그라미와는 180도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텐데, 제가 의도한 대로 잘 연기해서 많은 분이 응원해줄 수 있는 캐릭터로 남고 싶은 마음입니다."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