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까지 불안…안갯속에 빠진 파키스탄 경제
파키스탄은 최근 해외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데 총력을 다하고 있다. 26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무르타자 사이드 파키스탄중앙은행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이 다음달 파키스탄에 13억달러를 신규 지원하는 안을 승인할 것”이라며 “일각의 우려만큼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다”고 말했다.하지만 세계 5위 인구 대국(2억3000만 명)인 파키스탄의 최근 상황은 심상치 않다. 지난주 신용평가사 피치는 파키스탄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파키스탄의 외환보유액은 지난 1월 166억달러에서 이달 중순 93억여달러로 70억달러나 급감했다. 현재 외환보유액으로는 파키스탄의 두 달치 수입액조차 해결하지 못한다. 중국이 주도한 일대일로에 참여하며 국가 채무가 불어난 상황에서 코로나19, 물가 급등, 달러 강세 등의 삼중고까지 겹치며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난 여파다. 파키스탄 국채 가치가 하락(금리 상승)하면서 파키스탄과 미국 국채의 금리 격차는 17%까지 벌어졌다. 파키스탄 루피의 가치(미국 달러 대비)는 지난주에만 7% 이상 하락했다. 1998년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그나마 파키스탄은 5월에 디폴트를 선언한 스리랑카보다는 사정이 낫다. 파키스탄이 내년 6월까지 부채를 상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335억달러다. 파키스탄은 상환 필요 자금을 간신히 웃도는 359억달러를 확보해 놓았고 이달 중순에는 IMF와 11억7000만달러 규모 구제금융 지원에도 합의했다.
하지만 파키스탄의 불안한 정세가 변수다. 파키스탄은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IMF의 요구를 그동안 충실히 이행했다. 지난달 철강, 자동차 등의 주요 산업에 과세를 확대한 데 이어 연료 보조금도 철폐했다. 5월엔 비필수 사치품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에 조세 부담, 각종 규제가 겹치자 민심은 야당 쪽으로 기울었다. 지난주 임란 칸 전 파키스탄 총리가 이끄는 파키스탄정의당(PTI)이 파키스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펀자브주 보궐선거에서 의석 20석 중 15석을 차지했다. 이를 발판 삼아 칸 전 총리는 조기 총선을 요구하고 있다.
칸 전 총리가 재집권할 경우 현 정부가 IMF와 진행했던 구제금융 논의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신흥국 4개월 연속 자본 순유출…2015년 이후 최초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과 자국의 국채 금리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신흥국은 21개국이다. 그만큼 해외 투자자들이 신흥국의 경제 전망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신흥국 채권·주식시장에서 지난달에만 40억달러가 유출됐다. 3월부터 4개월 연속 신흥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갔다. 이는 2015년 이후 최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식량, 에너지 등의 가격이 뛰면서 경제 성장이 위축된 가운데 달러 강세로 신흥국들의 외채 부담도 커졌다.경제 위기에 직면한 신흥국이 어디인지도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영국 경제분석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앞으로 4년 안에 디폴트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몽골, 미얀마, 라오스 등을 꼽았다. EIU는 보고서에서 “몽골은 자금 조달 여건이 제한된 상황이라 내년까지 신규 부채를 찍어 기존 부채 이자를 지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미얀마는 지난달 외환보유액을 채우기 위해 자동차 수입을 금지했다. 방글라데시도 27일 인플레이션과 달러 강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IMF에 45억달러(약 6조원) 규모의 차관을 요청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집트, 엘살바도르, 튀니지 등 15개국의 국채가 이미 디폴트 상태이거나 부실 수준으로 평가받으며 거래되고 있다고 분류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경제 위기에 직면한 신흥국은 53개국에 달한다”며 “선진국의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계속 인상하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마무리되고 인플레이션이 잡혀야 신흥국들이 디폴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물가가 진정되면 수입 의존도가 높은 신흥국들의 경상수지가 개선될 수 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해 강달러가 진정될 가능성까지 커진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