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에서 기차를 내려 구름다리를 건너자 마치 운하처럼 이어져 바다와 육지 사이 인공섬을 감싸는 수로가 눈 앞에 들어왔다. 시선 위로 부산항대교가 펼쳐진 인공섬 끝자락엔 2024년 10월 개관 예정인 오페라하우스 공사가 한창이었다. 향후 호텔과 쇼핑몰 등 상업시설과 오피스 등이 들어설 이 곳은 한국전쟁기 배를 타고 이북에서 넘어온 피란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부산 북항 재래부두 자리다.
같은 시간 이 곳에서 서쪽으로 30㎞ 가량 떨어진 부산신항 내 최신 항만 6부두 부산컨테이너터미널(BCT)에선 30m 높이의 야드크레인이 트레일러에 실린 40피트(약 12m) 길이의 대형 컨테이너를 들어올려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었다. 여의도공원 3개와 맞먹는 63만㎡의 크기를 자랑하는 터미널이지만 현장에선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항만 전반에 무인·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한 결과다.
○북항 재래부두 관광·상업 공간으로 재탄생
이 같은 부산항의 사뭇 다른 두 모습은 1876년 개항 후 146년만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이뤄지는 항만 신·구 세대교체 현장이다. 부산역과 인접한 북항은 개항 이후 신문물의 교류지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수탈의 창구로 활용됐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국내 최대 무역 항만으로 거듭나며 1960~1990년대 고도성장기엔 수출 화물을 나르는 화물선들로 붐볐다.하지만 2000년대 이후 원양 컨테이너선 등 상선들의 몸집이 점점 커지면서 1만TEU(20피트 길이 컨테이너 1개)가 넘는 대형 컨테이너선이 접안할 수 없는 북항 1~4부두와 중앙부두 등 재래부두는 점점 기능을 잃어갔다. 재래부두 옆에 1978년 문을 연 국내 최초 컨테이너 터미널 자성대 부두 역시 기능이 축소되며 5000TEU가 넘는 중형급 이상 선박들은 부산항대교 건너편 북항 외항에 있는 신선대·감만·신감만 부두와 2006년 문을 연 신항으로 넘어갔다.
2012년 연간 1704만TEU 수준이던 부산항 전체 컨테이너 처리량은 2021년 2270만TEU로 33% 증가하며 국내 전체 처리량(3003만8000TEU)의 75.6%를 책임진 국내 최대, 세계 7위 항만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북항의 처리량은 760만TEU에서 716만TEU로 역성장했다. 원양 운송의 대세가 된 1만TEU급 컨테이너선들이 최신 시설을 갖춰 물류 작업 속도가 빠른 부산신항으로 몰리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에 정부는 2008년부터 재래부두를 중심으로 북항 재개발 사업을 추진해왔다. 14년에 걸친 1단계 사업을 통해 재래부두 가운데 역사적 상징성이 큰 1부두를 제외한 2~4부두와 중앙부두 등이 상업·업무 시설과 마리나, 공원 등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총 153만㎡로 여의도공원 7개 규모다.
1단계 사업이 개발의 ‘터’를 닦는 것이었다면 올해 예비타당성조사를 거쳐 2023년 하반기부터 본격 조성에 들어가는 2단계 사업은 보다 복합적이다. 자성대 부두를 비롯해 이들 구식 부두에서 화물을 나르던 철도시설과 부산역·부산진역, 좌천·범일동 인근 노후주택 밀집 지역 등 228만㎡가 재개발 대상에 포함된다.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세계 3대 국제행사로 꼽히는 세계 엑스포와 연계해 이 곳을 해운대와 맞먹는 부산 관광의 ‘메카’로 키운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강준석 부산항만공사(BPA)사장은 “항만으로서 기능을 잃은 구항만에 새로운 기능을 불어놓는 것은 항만 역사가 긴 선진국들이 직면한 오랜 과제”라며 “북항 내항의 기능을 항만에서 관광·업무·주거 등으로 재편해 부산 전체의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12조 투입해 세계 3위권 스마트항만 구축
북항을 대신해 한국의 물류를 이끄는 곳은 부산시 강서구와 창원시 진해구 경계에 있는 부산신항이다. 지난 5월 가동을 시작한 BCT까지 총 6개 부두에서 연간 1670만TEU의 컨테이너 화물 처리가 가능한 국내 최대·최신 항만이다. 부산 신항 구축에는 1995년부터 현재까지 약 20조원 가량이 투입됐다. 작년 말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진해신항 사업에 총 12조6000억원 가량을 투입해 2040년까지 연간 4200만TEU를 처리할 수 있는 세계 3위권 ‘허브 항만’을 조성한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새롭게 개발되는 항만은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로보틱스 등이 결합된 ‘스마트 항만’으로 구축한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다. 정부는 광양항을 자동화항만 테스트베드로 선정하고 트레일러에 컨테이너 박스를 싣고 내리는 야드크레인부터 이를 선박에 적재하는 안벽 크레인, 안벽에서 야드로 화물을 옮기는 이송 부문까지 항만 전 영역을 자동화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국내서 가장 최신 설비를 갖춘 BCT의 경우 야드 크레인에 자동화 시스템이 탑재되고 안벽 크레인의 원격 조종이 가능하지만 아직 부분 자동화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26년까지 광양항에서 자동하역과 무인수송 등 항만자동화 기술 검증을 끝낸 뒤 진해신항 등 신규 개발 항만에 이를 적용할 계획이다. 완전 자동화가 이뤄질 경우 컨테이너 처리 속도 등 생산성이 30% 이상 향상된다는 것이 해양수산부의 설명이다.
이에 더해 부산신항에는 선박 수리·개조, 액화천연가스(LNG)벙커링 기능까지 추가된다. 점차 강화되는 환경 규제를 지키기 위해 수년전부터 주요 선사의 신규 대형 컨테이너선 대부분이 LNG를 대체 연료로 사용하는 LNG이중연료추진선들로 채워지고, 기존 디젤 선박들도 온실가스 저감을 위한 각종 시스템을 장착하는 등 선박 수리·개조 수요가 늘어나는 것을 반영한 조치다.
김창균 해양수산부 항만국장은 “국내 최초의 항만 세대교체가 부산에서 이뤄지고 있다”며 “첨단 스마트 기술과 최신 해운 트렌드를 반영한 항만 개발을 통해 국가 전체의 물류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