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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면 내년부터 일본 상장기업들은 분기마다 실적과 사업 현황을 공시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게 된다. 기업 부담을 줄여주면서 임금 인상을 유도하려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요구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14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상장기업이 3개월마다 실적 등을 공시하는 의무를 폐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일본 금융상품거래법은 주식과 채권을 발행하는 기업이 분기 말로부터 45일 이내에 분기보고서를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본 금융청은 이르면 내년 2월 열리는 통상 의회에 법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다만 분기 실적 수치만 간단하게 공시하는 결산단신은 유지한다.
분기보고서 폐지는 기업의 부담 경감과 임금 인상 유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정책으로 분석된다. 회계법인의 감사를 받는 분기보고서 작성에는 보통 1개월 이상이 걸린다. 간사이경제연합회는 이달 “분기보고서를 작성하려면 막대한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며 폐지를 요구하는 긴급제안서를 발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지정학적 위험이 높아지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확산으로 기업들이 대응 인력을 집중시키는 추세도 분기 공시가 부담스러운 이유다. 분기보고서 폐지는 기시다 총리의 핵심 경제정책인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을 위한 조치기도 하다. 기시다 총리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기업의 임금 인상을 꼽고 있다.
3개월마다 실적을 공개하는 현 제도는 “기업이 단기적인 이익과 주주 배당을 우선시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분기보고서를 없애면 기업들이 단기 이익에만 신경쓰는 주주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임금 인상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일본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분기보고서를 폐지하면 경영 투명성이 낮아져 해외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을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은 7~8년 전부터 공시 의무를 폐지했다. 하지만 상장사 대부분이 미국 투자자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자발적으로 분기보고서를 공시하고 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