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미국 중앙은행(Fed) 회의를 계기로 엔화 가치가 추락하고 있다. 외형상 이유는 미국과 일본 간 디커플링 통화정책에 따른 양국 간 금리 격차가 커지는 데 있다. 금리 차와 환차익을 노리는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미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엔화를 매도하고 달러화를 매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엔저 현상에 국제적 관심이 더 쏠리는 배경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사임 이후 주춤했던 ‘아베노믹스’의 부활 가능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의문점을 풀어보기 위해서는 1990년대 ‘대장성 패러다임’과 ‘미에노 야스시 패러다임’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전자는 ‘엔저와 수출 진흥’으로 상징되나, 후자는 ‘물가 안정과 중앙은행 독립’으로 대변된다.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는 수많은 경기침체 요인이 얽히고설키며 복합 불황에 빠졌다. 가장 큰 요인은 배리 아이컨그린 미국 UC버클리 교수가 주장한 ‘안전통화 저주(curse under safe haven)’와 관련 있다. 경기침체에도 엔화 가치가 오히려 강세를 보이며 일본 경제를 더 어렵게 하는 현상이다.
1980년대 ‘도요타 자동차’와 ‘소니 전자’로 상장되는 제조업 전성시대 이후 일본 경제의 최대 현안은 ‘당면한 디플레이션 국면을 언제 탈피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1980년대 연평균 4.7%에서 1990년대 이후 1.2%로 급락한 것은 주로 내수 부진에 기인했다.
거듭된 정책 실수도 경기침체 기간을 연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90년 이후 무려 25차례가 넘는 경기부양책을 시행했지만, 재정 여건만 악화시켰다. 기준금리도 ‘마이너스 수준’으로 내렸으나 경기회복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각종 구조조정 정책을 20년 넘게 외쳤으나 효과를 보기는커녕 일본 국민의 불신만 키워 ‘좀비 경제’로 추락시켰다.
일본 경제가 내수 부문의 활력을 되찾아 디플레이션 국면에서 탈피하기란 쉽지 않다. 내수 부진이 인구 고령화, 높은 저축률 등 구조적인 요인에 있기 때문이다. 재정 여건도 크게 악화해 적자 국채 발행에 따른 ‘구인(驅引·crowding in)’보다 ‘구축(驅逐·crowding out)’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
일본 경제가 직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경제 기초여건 이상으로 강세를 보이는 엔화 가치가 약세로 돌아서야 한다. 집권 자민당은 일본 경제가 1990년 이후 장기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장 큰 요인으로 당시 미에노 야스시 일본 중앙은행 총재가 물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비타협적 통화정책을 고집스럽게 펼친 점을 꼽았다.
2012년 12월 아베 총리가 재집권하자마자 엔저를 통해 성장을 지향하는 구로다 하루히코 현 일본은행 총재를 전격 영입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경기 상황과 통화 가치가 따로 노는 악순환 국면을 차단하는 것이 일본 경제를 회복시키는 최후 방안’이라는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명예교수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베노믹스를 추진했다.
아베노믹스를 추진한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엔저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마셜-러너 조건, 즉 외화표시 수출수요의 가격탄력성과 자국 통화표시 수입수요의 가격탄력성을 합한 값이 ‘1’을 넘어야 하지만 일본의 수출입 구조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구로다 총재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2015년 일본 국회에서 엔·달러 환율이 125엔 이상 넘어가면 엔저 효과는 제한된다고 증언했다. 이른바 국제금융시장에서 알려진 ‘구로다 라인’이다. 이번에도 엔·달러 환율이 이 선에 다가서자 시장에 개입(달러 매도, 엔화 매입)했다.
엔저는 ‘비협조적 게임(noncooperative game)’에 해당하는 근린 궁핍화 정책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수록 각국은 ‘협조적 게임(cooperative game)’에 임해야 한다. 일본은 엔저 정책을 포기하고 국가채무가 문제라면 ‘소비가 미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부(負)의 저축세’ 등을 통해 내수 진작책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그것만이 일본 경제가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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