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조선 계열사인 A사는 작년 11월 말 수립한 올해 경영 계획을 수정하려던 작업을 최근 중단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향방을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업 계획 수정이 의미가 없다는 회사 판단에서다. A사 관계자는 “각종 원자재 가격과 환율이 매일 요동치고 있어 원가 분석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며 “지금은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루블화 환차손 피해도 불가피
8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올 1분기 영업이익 컨센서스(시장 전망치)가 지난달 초 대비 한 달 새 하락한 상장사는 131곳(금융회사 제외) 중 76곳(58.0%)에 달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에 따른 유가 등 원자재 가격 급등이 반영된 결과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석유화학과 조선 업종 하락세가 뚜렷했다. 롯데케미칼 영업이익은 3137억원에서 1451억원으로, 절반 이상(53.7%)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한화솔루션(29.7%), LG화학(10.7%), 효성화학(8.3%)도 한 달 전 대비 영업이익 전망치가 크게 줄었다.
플라스틱과 섬유 원료로 ‘석유화학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 가격이 유가 상승으로 14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영향이 컸다. 나프타 가격이 오르면 플라스틱과 의류, 고무 등 소비재 원가도 상승한다. 러시아는 한국의 최대 나프타 수입국이다. 한국의 지난해 수입량 2900만t 중 23%(667만t)를 들여왔다. 투자업계는 석유화학 기업이 원가 상승과 수급 불안이라는 이중고를 겪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사도 전쟁의 직격탄을 피해 가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당초 조선사는 전쟁에 따른 유가 급등으로 유럽발 액화천연가스(LNG)선 발주가 늘어나면서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업계는 러시아 금융회사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퇴출 등 국제 사회의 금융 제재가 장기화하면 발주 취소, 인도 거부 등 리스크가 현실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가’로 지정하고 기업과 개인의 채무 등을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로 상환하겠다는 조치를 내린 것도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조선사는 통상 달러나 유로로 선박 건조대금을 받는다. 루블화 가치가 폭락해 대금을 받더라도 국내 조선사는 대규모 환차손을 볼 수밖에 없다.
“우크라 전쟁 수혜주는 없다”
정유업계는 통상 유가 급등에 따른 대표적인 수혜주로 꼽힌다. 에프앤가이드 조사에서도 SK이노베이션은 한 달 전에 비해 1분기 영업이익 전망치가 5755억원에서 5979억원으로 3.9% 늘었다. 같은 기간 에쓰오일도 6190억원에서 6388억원으로 3.2%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다만 이 같은 수익 증가는 재고자산 평가이익이 ‘장부상’ 늘어난 것일 뿐 실제 현금 흐름과는 무관하다.정유업계는 오히려 급격한 유가 상승이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이어져 석유화학 제품 수요가 감소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당장 정유업계의 핵심 수익지표인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이달 첫째 주 배럴당 5.7달러로, 2월 첫째 주(7.5달러) 이후 5주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통상 유가가 오르면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을 뺀 정제마진도 상승한다. 업계 관계자는 “전쟁 여파로 유럽 지역의 석유제품 수요가 침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공급 불안으로 유가가 급등하면 정유사 실적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SK이노베이션 등 정유사는 지난달 평균 80%대까지 끌어올렸던 공장 가동률을 단계적으로 낮추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투자업계는 이번 전쟁이 장기화하면 특정 업종에만 피해가 국한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은 ‘유가 등 원자재 가격 상승→물가 상승→구매력 감소→수요 감소’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이 현실화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경제계 관계자는 “대다수 기업이 올초까지만 하더라도 우크라이나 변수를 과소평가했다”며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처럼 인플레이션 우려와 급격한 경기 둔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 악몽이 찾아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강경민/고윤상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