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거듭된 경고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레드 라인’을 넘어섰다.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지역인 돈바스에 러시아군을 투입하라고 명령하면서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주권 침해로 규정하고 제재에 나섰다. 이번 사태가 우크라이나 접경 국가에 병력을 증강하고 군사훈련을 벌여온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러시아 간의 군사적 충돌로 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가운데 미·러는 24일 외교장관 회담을 통해 사태 해결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어서 결과가 주목된다.
미·러 회담 앞두고 기습적 파병
푸틴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자칭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승인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이어 두 곳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라고 러시아 국방장관에게 지시했다. 인테르팍스통신에 따르면 러시아는 이들 지역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기로 했다.푸틴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는 고대 러시아 땅으로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며 “1991년 소련이 붕괴할 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또 “우크라이나에는 진정한 국가의 전통이 없으며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선 미국의 식민지”라고 비난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주권 침해라고 반발했다. 그는 “러시아에 아무것도 넘기지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가 어떻게 결정하든 우크라이나의 국경선은 현재에서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과 서방은 즉각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나섰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DPR과 LPR에 미국인의 신규 투자, 무역, 금융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독일과 영국은 “리투아니아 등 NATO에 추가 병력을 보낼 수 있다”며 일제히 제재 방안을 발표했다. 독일은 러시아와 연결된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의 사업을 중단하기로 했고, 영국은 러시아 은행 다섯 곳과 개인 3명에 대한 영국 내 자산 동결과 입국 금지를 결정했다. 영국의 제재 대상에는 로시야은행과 푸틴 대통령의 측근인 겐나디 팀첸코 SKA 상트페테르부르크 구단주 등이 포함됐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러시아에 대한 첫 제재지만 푸틴 대통령이 더 나아간다면 추가 제재를 내놓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면전으로 확대되나
러시아가 돈바스 지역에 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하면서 우크라이나 사태가 어떻게 비화할지 관심이 집중된다. 조지아 침공과 크림반도 강제 합병 때처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있다.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에 파견한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조지아 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자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조지아를 침공해 5일 만에 승리했다. 2014년 크림반도를 손을 넣을 때는 설문조사가 합병 근거가 됐다. 당시 러시아는 주민 96%가 합병에 찬성한다는 주민 투표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DPR과 LPR이 2014년 시행한 분리독립 투표에서도 89%가 찬성했다.
러시아가 아예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함락시킬 수 있다는 예상까지 나온다. CNN 방송은 미 고위 관리를 인용해 “러시아군이 곧 돈바스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러시아가 키예프 외에 다른 주요 도시들도 침공할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 영토 전체가 러시아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AP통신은 “실제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진입할지 현재로선 불명확하다”고 전했다.
미국도 공식적으로 러시아군의 돈바스 지역 진입을 ‘침공’으로 규정하는 것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 정부 고위당국자는 이날 전화 브리핑에서 “러시아는 이전에도 돈바스 지역에 8년간 주둔했다”며 “러시아군이 돈바스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주둔 단계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 당국자는 ‘정확한 침공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탱크가 실제 굴러갈 때까지 외교를 계속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러시아 외무부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 외무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회담은 예정대로 2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다고 발표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