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대표작 ‘설국’의 첫 구절입니다. 발왕산 주목을 보러 가는 길, 문막을 지날 때부터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주변 산들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습니다. 화려한 눈꽃으로 치장한 겨울 산은 수식이 필요없을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겨울의 한복판으로 눈꽃 트레킹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겨울연가’ 촬영지의 눈부신 설경
강원 평창 대관령면과 진부면의 경계에 있는 발왕산(1458m)은 적설량이 많아 겨울 설경을 보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명소다. 발왕산 주위에는 옥녀봉(1146m)을 비롯해 두루봉(1226m), 고루포기산(1238m) 등이 솟아 있고 동쪽 계곡에는 송천의 물길이 지나간다. 눈꽃 트레킹의 백미인 눈 덮인 주목을 보려면 겨울 산을 헤치며 적어도 3시간 이상 산을 타야 하지만 발왕산에선 비교적 쉽게 주목과 만날 수 있다.관광 케이블카를 타고 발왕산 정상 9부 능선에 있는 모나파크까지 오르면 된다. 편도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2~3시간 안에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물론 눈꽃 산행을 제대로 하려면 스키장 옆 등산로에서 시작해 정상을 찍고 능선 고개로 내려오면 된다. 4~6시간 정도 걸린다.
케이블카 총연장이 3.7㎞나 돼서 편도 탑승 시간만 15분 정도 걸린다.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부근에 내리면 바로 스카이워크로 이어진다. 아래에서 스카이워크를 올려다보면 허공에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길게 길을 낸 것처럼 보인다. 스카이워크 끝에는 바닥을 유리로 투명하게 만들어 스릴 넘치게 주변 경관을 내려다보도록 했다. 스카이워크 주변은 일본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켰던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다. 드라마 속 설경과 일몰 등 상당 부분을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8왕눈이·아버지…이름도 재밌는 주목들
스카이워크에서 나와 정상 쪽으로 오르면 천년의 주목 숲길이 펼쳐진다. 중간중간 데크로 이어진 길에서 1000년 이상 된 주목을 만날 수 있다. 발왕산 주목들은 상록교목이다. 고산 지대를 좋아하고 겨울철에도 푸르고 키가 크다. 높이는 17m, 지름은 1m까지 자란다고 한다.숲길에서는 다양한 주목을 만날 수 있다. 제일 먼저 마주하는 주목은 8개의 구멍이 있어 ‘8왕눈이 주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완만한 경사로를 오르니 이번에는 3대가 함께 살고 있다 해서 ‘종갓집 주목’이라고 명명된 나무가 보인다. 자세히 보니 줄기가 세 개로 나뉘어 있다. 산책로 중간에는 왕수리부엉이의 보금자리가 있는 아버지 왕주목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1800년 역사를 지닌 국내 최고 수령의 나무다.
주목의 가지가 탐방객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는 겸손나무도 눈길을 끈다. 사람은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말없이 알려주는 듯하다. 산책로 끝에는 어머니 왕주목이 있다. 어머니 왕주목은 가을이면 붉은 열매가 달리는 마가목을 품고 있다. 어린 자녀를 품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리라. 발왕산 정상인 평창평화봉까지는 10분 정도면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 등산로를 따라가면 국내 최대 독일가문비나무 군락지를 만날 수 있다. 가문비나무가 눈과 만나니 영락없는 크리스마스트리다.
화려한 눈꽃 즐기는 선자령 트레킹
평창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눈꽃 트레킹 명소는 선자령이다. 대관령과 선자령 사이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길은 가장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눈꽃 트레킹 코스다. 선자령 트레킹의 시작점은 옛 대관령휴게소(해발 840m)로, 시작 지점에서 정상까지 대략 300m밖에 되지 않아 겨울 산행 장비만 제대로 갖춘다면 누구나 쉽게 화려한 눈꽃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전체적인 코스는 옛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해 KT 송신소를 지나 전망대를 거쳐 선자령까지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간다. 총거리(왕복)는 10㎞ 정도. 천천히 여유롭게 걸으면 4~5시간가량 걸린다. 선자령 코스는 능선길과 계곡길 두 개로 나뉜다. 백두대간 능선길은 조망이 탁월하고, 계곡길은 아늑해서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능선길이 보여주는 풍경의 규모가 웅장한 데 비해 계곡길은 잣나무, 낙엽송, 참나무, 속새, 조릿대 등이 군락을 이루며 아기자기한 풍경을 보여준다. 전망대를 지나고부터는 어느 순간 숲이 사라지고 시야가 트이면서 하얀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선자령 풍력발전단지를 마주하게 된다.
체력이 허락한다면 하늘목장과 삼양목장으로도 길이 이어지니 같이 즐길 만하다. 눈 내린 날의 삼양목장은 경이롭다. 목장 초입부터 정상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목장 곳곳에 있는 바람의 언덕, 숲속의 여유, 사랑의 기억, 초원의 산책, 마음의 휴식 등의 코스를 걸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평창=글·사진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