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고위 재무 관료가 얼마 전 정치권을 향해 독설을 퍼부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야노 고지 재무성 차관으로,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서 차관직은 관료그룹에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봉이다. 야노 차관은 일본 정치권의 돈 뿌리기를 로마 시대 우민화 정책 상징인 빵과 서커스에 비유하면서 일본이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호와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이런 말을 남겼는데,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재무성 인간이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된다. 나는 그것을 부작위의 죄라고 생각한다. 국가 공무원은 국민 세금으로 봉급을 받아 일한다. 올바른 것을 말하는 개가 돼야 한다.”
부작위(不作爲).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당시 그의 독설을 보면서 우리 한국의 상황을 말하는 것 아닌가, 순간 착각했다.
재무성 격인 한국의 기획재정부는 어떤가. 지난 5년의 모습은 야노 차관의 독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정권의 자동인출기(ATM).’ 처음부터 대놓고 재정을 퍼붓겠다는 정권의 국정운영 방향에 전혀 어긋남이 없이 곳간을 활짝 열어젖힌 곳이 기재부다.
과거 기재부 선배들은 그러지 않았다. 돈 씀씀이를 편성하는 예산실의 첫 번째 직무수행 원칙은 한정된 재원을 적재적소에 배정해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것이다. 매년 예산 편성 시즌이 되면 각 부처가 요구한 예산을 누가 더 많이 깎느냐를 놓고 예산실 과장들끼리 배틀이 벌어지는 게 일상이었다.
예산실에서 그렇게 훈련받은 부총리는 엉뚱하게 반대로 갔다. 오히려 앞장서 곳간을 허는 역할을 했다.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에서 불가피했다고 방어하겠지만, 피해는 차별적인데 돈 풀기는 무차별적으로 한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 정치권의 돈 풀기 요구에 맞서 때때로 각을 세웠다 말할 테지만, 결과적으로 부총리 뜻을 제대로 관철시킨 게 몇이나 되는가. 어찌 보면 이 정권은 처음부터 재정을 퍼붓겠다는 의도를 갖고 예산실 출신 부총리를 연달아 기용했을 것이란 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기재부는 이렇게 지난 5년간 국민의 충견이 아닌 정권의 충복으로 살아온 것도 부족한지, 이제는 다음 정권의 충복이 되려고 작정한 것 같다. 과거 입장을 뒤집어 이번엔 부동산 세금을 깎아주자는 여당 후보 주장 한마디에 조세 원칙까지 무너뜨리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공시가격 한시 동결, 종부세 부분 완화 같은 누가 봐도 땜질식이고 시장을 왜곡시키는 대책에 처음에는 반대하는 듯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180도로 입장을 바꾼 기재부다.
세금 감면안을 마련해 발표한다는 시점도 공교롭게 내년 3월이란다. 기재부가 대선용 세금 조작 전위대로 나서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내년 경제정책 방향을 보면 더욱 놀랍다. 3조3000억원의 세금을 투입해 만들 공공 단기 일자리 106만 개 중 54%를 1월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나, 1분기 전기·가스요금을 동결하겠다는 것 등 곳곳에 대선 스케줄에 초점을 맞춘 듯한 정책이 숨어 있다. 대선용 3개월짜리 대책을 세운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부총리야 이미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기재부 공무원들이 집단 침묵으로 일관하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이번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어 정책을 줄줄이 원위치하면, 또 거기에 맞게 순응하며 살겠다는 건가.
대선에서 정부가 집권 여당의 선거운동에 동원된 것이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지만 이번처럼 노골적인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 정도면 내부 고발자라도 나올 법한데, 야노 차관처럼 “아닌 건 아니다”고 용기있게 말하는 관료는 진정 한 명도 없는 것일까.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