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미국 동포였던 권순영 씨(74·사진)의 눈에 아프가니스탄의 참상이 들어온 건 2002년 9월이었다. 탈레반 응징을 위한 미국의 군사개입과 오랜 내전 여파로 “신생아 4명 중 1명이 5세가 되기 전에 영양실조로 죽는다”는 뉴스를 본 게 계기였다.
고려대 농예화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 권씨는 오하이오주립대 식품생화학 박사과정을 거쳐 당시 글로벌 식품기업 네슬레에서 영양식 담당 디렉터로 일하던 때였다. 뉴스를 접한 뒤 “영양실조는 내가 잘 아는 분야인데…. 그동안 주변에서 도움받은 걸 갚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음이 움직이자 몸도 따랐다. “너무 위험하다”며 만류하는 아내와 회사를 설득하는 작업과 아프간을 영양실조에서 구할 식품을 찾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영양과교육인터내셔널(NEI)’이란 비영리단체를 세우고 뜻을 같이할 ‘동지’도 찾아나섰다. 사업에 탄력이 붙자 2008년부터 네슬레 임원 자리를 내던지고 NEI에 ‘올인’했다.
이후 권순영표 ‘콩 재배·보급 프로젝트’는 순항했다. 2006년 300㎏이었던 수확량은 15년 만인 지난해 6000t으로 2만 배 늘었다. 영양실조 문제가 개선되자 아프간 언론은 그를 ‘콩의 아버지’, ‘콩박사’로 불렀다. 아산복지재단은 그에게 지난 26일 ‘아산상 사회봉사상’을 수여했다.
권 대표는 28일 기자와 만나 “‘뜻이 좋으면 하늘이 돕는다’는 옛말처럼 어려울 때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이만큼 올 수 있었다”며 “2019년에는 아프간 대통령이 군대 납품을 허용해준 덕분에 현지 판로가 확 넓어졌고, 10여 년 전에는 한국과 일본 정부가 지원해준 덕분에 사업이 안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권 대표는 콩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영양실조의 원인인 단백질 부족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작물인 데다 현지인 입맛에도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아프간에서 콩을 재배하는 농가는 거의 없었다. 권 대표는 아프간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종자를 들여오고, 영농법을 알려주는 동시에 두유 제조설비 등 각종 가공시설을 들여왔다. 이 덕분에 ‘생산-가공-판매-소비’ 등 콩을 둘러싼 모든 과정이 현지화됐다. 권 대표는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힘썼다”고 했다.
권 대표의 다음 목표는 2030년까지 아프간의 콩 생산량을 30만t으로 늘리는 것이다. 이르면 내년부터 필리핀에서 제2의 콩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나이를 잊은 노(老)사회사업가에게 ‘20년 NEI 활동’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글쎄요. 잃은 거라면 네슬레를 조기 은퇴한 게 제일 큰 것 같네요. 얻은 건 뭐니뭐니 해도 남을 도왔다는 행복감이죠. 그렇게 보면 ‘남는 장사’ 한 겁니다. 조기 은퇴에 따른 금전적 손실이 한 국가의 영양실조 해결에 도움을 줬다는 뿌듯함보다 클 리 없잖습니까.”
오상헌/이선아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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