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방탄소년단(BTS)이라는 그룹이 '쩔어'로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뮤직비디오를 본 해외 팬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리액션 영상들이 탄생했다. 국내에서는 빅뱅, 엑소 등 대형 기획사에서 배출한 인기 그룹들이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시기였다. 업계에서는 놀라움과 의구심이 공존했다. '반짝인기'는 아닐까.
점차 의구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방탄소년단의 해외 투어에 전 세계 팬들의 열성적인 지지가 쏟아진다는 관계자들의 전언이 끊이지 않았다. 2000석 공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시작한 이들은 거침없이 아레나 급으로 영향력을 넓혔고, 이내 5만 명 정도를 수용하는 스타디움까지 접수했다. 9만 명이 관람할 수 있는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까지 꽉 채웠다. 전원 한국인 멤버로 구성된 이 팀은 마침내 중소기업이었던 빅히트엔터테인먼트를 거물급 IT기업 하이브로 탈바꿈시키기에 이르렀다.
한국 대중음악 업계는 오래전부터 미국 시장의 문을 두드려왔다. 원더걸스를 데리고 무작정 미국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린 JYP엔터테인먼트 수장 박진영의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최근 가수 비 역시 직접 제작한 아이돌 그룹 싸이퍼의 데뷔 쇼케이스에서 "스승님인 박진영이 맨해튼 한복판에서 뛰어다니면서 내 곡을 팔 때 '굳이 저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원더걸스를 시작으로 싸이, 2NE1 씨엘 등이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오르며 K팝 역사에 유의미한 기록을 남겼다. 이제는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인기 K팝 그룹들이 연일 신기록 소식을 전하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국내 음원차트에서만 가능할 줄 알았던 '롱런'을 빌보드에서도 이뤄냈다. 최근 싱글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32주 차트인에 성공하며 종전 한국 가수 최장 기록(31주)을 보유 중이던 싸이를 8년 만에 넘어섰다.
그뿐만 아니라 몬스타엑스, 스트레이키즈, 에이티즈 등 다수의 아이돌 그룹들이 두터운 미국 팬덤을 지니고 있다. 카카오와 스포티파이의 유통 계약이 끝나 해외 스포티파이에서 일부 K팝 음원이 제공되지 않았을 당시, 트위터상에서는 "당장 K팝을 내놓으라"는 해외 팬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 길거리에서 여러 차례 외면을 당하면서도 전단지를 돌리던 때를 떠올려보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방탄소년단이 소속된 빅히트뮤직을 비롯해 세븐틴, 뉴이스트가 있는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 여자친구가 속한 쏘스뮤직, 지코가 설립한 KOZ엔터테인먼트 등을 레이블로 두고 있는 하이브는 최근 빅히트 아메리카를 통해 미국 종합 미디어 기업인 이타카 홀딩스의 지분을 100% 인수했다. 인수 규모는 10억5000만 달러, 약 1조1860억 원이었다. 이로써 하이브는 자체 육성한 방탄소년단과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외에도 레이블 인수를 통해 폭넓은 아티스트 IP를 확보했다.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제이 발빈, 데미 로바토 등 글로벌 아티스트까지 합류했으니 영향력 또한 국내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이브의 이타카 인수는 본격적인 미국 시장 진출을 알리는 시그널이다. 실로 미국에서의 K팝 소비는 지난해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영향으로 대면 이벤트가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으로 급증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음반류 수출금액은 지난해보다 94.9% 증가했다. 가장 가파른 증가율을 보인 국가는 미국이다. 전년 동기 대비 117.2%가 뛰어 수년째 수출액 2위를 차지하던 중국을 추월했다.
이에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일제히 미국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하이브와 이타카는 각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거물급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견고한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강한 시너지를 낼 것으로 보인다. 방탄소년단의 입대가 늘 약점으로 꼽혀오던 빅히트 입장에서는 세계 톱 티어 라인업 구축이라는 최고의 성과를 이뤄냈다.
미국 시장 진출에도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빅히트는 유니버설뮤직그룹과 손잡고 미국 시장에서 K팝 보이그룹 데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2022년 방영을 목표로 추진 중인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멤버를 선발하며, 해당 그룹은 K팝 프로덕션 시스템을 따르게 된다. 미국 음악 시장에 'K팝 제작 시스템'을 이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미국에 앞서 일본에서의 'K팝 이식' 작업은 이미 시도된 사례가 있다. JYP 박진영은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현지화 그룹 니쥬(NiziU)를 선보여 '대박'을 쳤다. 정식 데뷔한 지 5개월 차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니쥬는 오리콘 차트를 휩쓸었고, 일본 현지의 주요 방송 및 광고계의 러브콜도 한 몸에 받고 있다. 지난해 JYP가 시가총액 1조를 넘겼을 때, 시총 1조 주역으로 꼽힌 이들이 바로 니쥬였다. 당시 니쥬는 정식 데뷔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K팝에 열성적인 지지를 보이는 일본은 부동의 1위 K팝 소비 시장이다. 이미 안정권이었던 일본 시장은 한한령을 시작으로 최근 과도한 문화공정까지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다시금 주요 전략 요충지가 됐다. 빅히트뮤직, JYP, YG, SM 등 대표 가요 기획사는 물론, 중소 엔터까지 일본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빅히트는 Mnet '아이랜드'에 출연했던 연습생 5인에 추가 멤버를 더해 일본을 기반으로 활동할 아이돌을 론칭하며, 아이즈원 출신인 미야와키 사쿠라를 영입하는 것 또한 일본 시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 '4세대 아이돌'로 야심 차게 출격한 에스파, 트레저, 엔하이픈 등 다수의 팀에도 일본인 멤버가 포함됐다.
그간 'K팝 육성 시스템'은 꾸준히 양산형 아이돌을 만들어낸다는 비판에 부딪히기도 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이러한 부분이 약점으로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K팝이 높아진 위상에 맞춰 공격적으로 진출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면서도 현지화 특성에만 초점을 맞춘 전략들이 자칫 그간 쌓아온 개성과 강점을 해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여러 아티스트들이 미국 시간에 맞춰 음원을 발매하거나 영어 곡만을 내놓는 등 해외 성과를 노린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에 해외 팬들이 개성이라 여긴 K팝 고유의 음악적 스타일까지 변질되어서는 안된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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