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일 사표를 제출했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반려하는 일이 발생했다. 홍 부총리가 공식적으로 사의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4월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을 정할 때 사의설이 돌기도 했지만 당시 청와대는 즉각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홍 부총리가 이번에 사의를 밝힌 것은 주식 양도소득세 논란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공약대로 과세 대상인 ‘대주주’의 범위를 확대해왔는데 여당이 범위 확대에 제동을 걸자 사표를 낸 모양새다. 하지만 재정건전성 부동산정책 등 각종 경제 현안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에 끌려다니며 경제 수장으로서 소신을 지킬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분석도 있다.
“사의 표명은 정치적 행보”
이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는 사실상 ‘홍남기 사표 공개 행사’였다. 홍 부총리가 “대주주 요건 강화를 둘러싼 혼란에 책임을 지고 오늘 사의 표명과 함께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힌 뒤 국회의원들의 질문은 모두 홍 부총리의 거취에 집중됐다. 정일영 민주당 의원은 “내년도 예산 심의가 이제 시작하는데 거취 표명을 하느냐”고 했고 당황한 김두관 민주당 의원은 준비한 질의를 서면으로 대체하기도 했다.기동민 민주당 의원은 홍 부총리의 사의 표명이 ‘정치적 행보’라고 지적했다. 기 의원은 “임명권자의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묵묵하게 과제를 수행하는 게 대통령 참모의 역할”이라며 “굳이 예산을 심의하는 자리에서 본인의 거취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이어 “왜 홍 부총리가 정치적 행보로 오해를 살 수 있는 여지를 주는지 의문”이라며 “사의 표명의 형식이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홍 부총리는 청와대의 사표 반려에 대해선 “예산 심의를 앞두고 있어 후임자가 지명되고 청문회를 거쳐 올 때까지는 부동산 정책이든 예산이든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 부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다른 배경 중 하나는 공시가격 관련 갈등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이 내년 보궐선거 표심을 위해 공시가격 반영률을 당초 90%에서 80%로 속도조절하자는 의견을 내자 홍 부총리가 90%를 제시하며 배수진을 쳤다고 전했다.
번번이 소신 꺾은 홍남기
홍 부총리는 2018년 12월 취임해 23개월간 부총리직을 수행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윤증현 기재부 장관(842일)에 이어 두 번째로 재임 기간이 길다. 2017년 5월 국무조정실장(장관급)으로 일할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 호흡을 맞춘 게 장수 비결로 통했다.하지만 여당과 청와대에 끌려다니는 관료 출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처음엔 경제 수장으로서 소신 있는 발언을 하다 끝내 뜻을 굽히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관가에서는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을 빗대 ‘홍두사미(洪頭蛇尾)’라는 말까지 나왔다.
지난 3월 있었던 1차 추가경정예산안 때가 대표적이다. 당시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홍 부총리의 해임까지 거론하며 추경을 압박했다. 홍 부총리는 이에 대해 페이스북에 “자리에 연연해하는 사람으로 비칠까 걱정”이라고 썼다. 하지만 1차 추경은 결국 최초안의 세부 내용만 소폭 변경된 뒤 통과됐다.
홍 부총리는 4월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기준을 두고도 정치권과 대립했다. 전체의 70%에게만 선별 지급해야 한다는 정부의 계획안이 정치권의 전 국민 지급안에 가로막혔다. 홍 부총리는 직원들에게 ‘결사항전’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정부안을 관철하는 듯했지만 끝내 전 국민 지급으로 선회했다. 4차 추경을 통해 지급한 2차 재난지원금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가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결국 지급하는 것으로 결론냈다.
9월 부동산 감독기구 설치에 대해서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국회와 청와대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부동산거래분석원을 설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홍 부총리가 지난달 야심차게 내놓은 재정준칙도 국회의 강한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홍 부총리가 이번에 사표를 제출한 것은 각종 정책에서 여당에 끌려다니자 ‘항의’ 차원이라는 평가가 많다. 홍 부총리는 청와대와 여당의 잇단 포퓰리즘 정책 주문에 지쳐 실제 그만둘 생각인 것으로 전해졌다. 관가 일각에선 홍 부총리 퇴진 이후 친여권 성향의 인사가 자리를 이어받으면 포퓰리즘 정책이 더욱 기승을 부릴 공산이 크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정인설/김형호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