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장사 경영진이 지난달 증시 호황을 틈타 5년 만에 최대 수준의 자사주를 처분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내부자’의 자사주 매각이 늘면서 증시 조정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4일 정보 분석업체 스마트인사이더 자료를 인용해 올 8월 미 증시에서 1042명의 최고경영자(CEO), 최고재무책임자(CFO), 임원 등 경영진이 67억달러어치의 자사주를 처분했다고 전했다. 경영진의 자사주 처분은 금액으론 2015년 11월 이후, 경영자 수로는 2018년 8월 이후 최대다. 스마트인사이더는 시가총액이 10억달러 이상, 경영진의 자사주 처분액이 1만달러를 넘는 경우만 집계했다. 실제 금액은 통계보다 더 많다는 의미다.
지난달 가장 많은 자사주를 판 경영진은 기술기업인 포티브그룹의 스티븐 레일스와 미첼 레일스 형제로 처분액은 10억달러에 달했다. 이 회사 주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폭락한 3월 이후 75%가량 올랐다. 여성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의 모회사 L브랜즈의 창업자 레슬리 웩스너도 지난달 8900만달러어치의 주식을 팔았다. L브랜즈는 코로나19에 따른 경영 한파로 7월 말 전 직원의 15%(850명)를 해고하고 연내 250개의 매장 폐쇄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주가는 코로나19 때 기록한 저점 대비 세 배 이상 올랐다.
글로벌 투자회사인 퍼시픽라이프펀드어드바이저스의 막스 고크만 자산배분책임자는 FT에 “최고경영진은 그동안 투자자보다 증시 전망에 대해 훨씬 비관적이었다”며 “미래가 흐릿한데 주가가 치솟는다면 주식을 파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경영진의 주식 매각은 코로나19로 폭락했던 주가가 반등한 올 2분기(4~6월)부터 급증했다. 주식 중개회사 스톤X가 나스닥100지수 소속 기업의 2분기 내부자 주식 처분액을 집계한 결과, 총 104억달러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171% 늘었다. 빈센트 델루어드 스톤X 거시전략가는 “내부자들은 1000년에 한 번 있을 대박을 친 것”이라고 말했다.
경영진의 주식 매각을 증시 조정의 신호탄으로 단정하기 이른 측면도 있다. FT는 경영진이 3월 주가 폭락 때 매입한 자사주를 되파는 건 아니라고 지적했다. 미 증시감독 규정상 내부자는 이익이 난 자사주를 6개월 이상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스마트인사이더의 자사주 처분 집계엔 ‘허수’가 일부 포함돼 있다. 예컨대 행동주의 헤지펀드 ‘트라이언 파트너스’가 지난달 보유하고 있던 몬델레즈, 제너럴일렉트릭(GE), 프록터&갬블 주식을 처분했는데, 공교롭게 이 펀드의 경영진이 이들 기업의 이사였다. 이 때문에 통계상 ‘내부자 주식 처분’으로 잡혔지만 실제로는 펀드매니저가 보유 주식을 판 것일 뿐 경영자의 자사주 처분과는 차이가 있다.
경영진의 자사주 매각은 이미 지난달부터 증시에서 거론됐지만 당시 시장에선 이를 큰 악재로 여기지 않았다. 마크 차이킨 차이킨애널리틱스 창업자는 경영진의 자사주 처분에 대해 “시장은 별로 신경 안 쓴다”며 “지금은 미 중앙은행(Fed)발 유동성 장세”라고 했다. 하지만 증시가 실물 경제 부진에도 사상 최고치를 넘나들다가 급락한 점은 부담이다.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는 이달 3일 4.96% 폭락한 데 이어 4일에도 1.27% 하락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나스닥지수는 4일 장중 한때 5% 넘게 급락하기도 했다. 다우지수와 S&P500지수도 3, 4일 연속 하락했다. 뉴욕증시가 연이틀 흔들리면서 국제 유가도 곤두박질쳤다. 4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0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원유(WTI)는 배럴당 4.5%(1.87달러) 하락한 39.5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WTI가 종가 기준 배럴당 40달러 선 아래로 떨어진 건 7월 30일 이후 처음이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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