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재확산하면서 "다시 한번 나랏돈을 과감히 풀자"는 정치권과 "무분별하게 재정을 풀 수 없다"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간 힘겨루기 '2라운드'가 본격화하고 있다. 1라운드는 홍 부총리의 완패였다. 홍 부총리와 재정 당국은 지난 3~4월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이슈가 나왔을 때 "소득 하위 50% 이하 가구에만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당의 압박에 100% 지급을 수용했다.
이번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국회에선 전국민을 상대로 2차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고 4차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기재부는 아직 2차 긴급재난지원금을 검토하기는 이르고, 하더라도 저소득층에 한해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홍 부총리가 방어해야 할 전선은 이뿐이 아니다. 재정건전성을 관리하는 법적 기준인 '재정준칙' 도입과 부동산 감독기구 설치 여부를 놓고도 국회·청와대의 압박에 맞서는 모양새다. 홍 부총리의 리더십이 다시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2차 재난지원금 필요" 주장 커져
올해 정부는 코로나19에 대응하느라 세 차례 추가경정예산안을 짰다. 3차 추경 편성은 1972년 이후 48년만이다. 이로 인해 올해만 재정 적자가 112조2000억원이 늘어난다. 역대 최대다. 정부는 3차 추경안 발표 이후 "올해 더 이상의 추경은 없다"고 선을 그어왔다. 지난 5월께부터 코로나19 확산세가 잦아들고 내수를 중심으로 경기 부진이 완화되기 시작해 정치권도 "올해 재정 풀기는 이만하면 됐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달 14일부터 코로나19 하루 신규 확진자가 100명 이상 쏟아지면서 기류가 바뀌었다. 국회에서 2차 긴급재난지원금과 4차 추경안 편성 주장이 터져나왔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21일 “코로나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앞으로 두 달 정도 경제가 다시 얼어붙을 것”이라며 정책위원회에 2차 긴급재난지원금 실무 검토를 지시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2차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문제를 시급히 협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구체적인 금액까지 밝혔다. 그는 지난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모든 국민에게 지역회폐로 1인당 30만원 정도를 지급하는 게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1차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에 소극적이었던 야당도 이번엔 동조하는 모습이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21일 "코로나19 사태를 생각해 재난지원금을 포함한 추경을 빨리 편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정 당국은 1차 긴급재난지원금 때와 마찬가지로 '신중론'을 펴고 있다. 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경제 충격이 커지면 고려해봐야겠지만 경기 영향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코로나19 재확산의 경기 영향은 좀 더 지켜봐야 하며 향후 방역 대책 강화로 확산세가 수그러들 가능성도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2차 긴급재난지원금과 4차 추경을 논의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앞서 집중호우 피해 복구를 위한 4차 추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제기됐을 때도 기재부는 같은 논리를 폈다. 기존 예산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한데도 4차 추경을 편성하자는 주장은 무책임하다는 얘기다.
홍 부총리는 또 2차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더라도 저소득층 등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홍 부총리는 지난 20일 "2차 재난지원금은 막대한 비용 부담을 고려해야 한다"며 "꼭 재난지원금이 아니라 그런 효과가 있는 대책을 맞춤형으로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재정건전성이 악화된 상황에서 코로나19의 피해가 크지 않은 고소득층까지 지원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다.
여당 일각에선 홍 부총리의 생각에 동조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을 맡고 있는 진성준 의원은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2차 재난지원금은 모든 세대에 지급하기보다는 일정 소득기준 이하의 중·하위 계층에 지급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진 의원은 "이 계층이야말로 코로나19 사태로 생활상의 타격이 커서 직접적이고도 신속한 지원이 필요하다"며 "앞으로 더 심각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음을 고려해 재정 여력을 조금이라도 더 남겨둘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재정준칙·부동산감독기구서도 압박
홍 부총리는 재정준칙 도입과 관련해서도 여당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그는 다음달 초 한국판 재정준칙 도입 방안을 발표할 것이라고 공언해왔다. 재정준칙은 재정건전성 유지를 위해 국가채무비율 한도나 재정 적자 증가 속도 등을 법으로 제한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여당은 "법제화를 포기하라"고 홍 부총리를 압박하고 있다.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1일 ‘재정준칙 도입 철회 촉구’ 보도자료를 내고 “기재부의 재정준칙안 국회 제출은 상당한 파장을 부를 것”이라며 “극심한 정치적 논쟁을 부르고 국가적 역량을 저해할 우려가 있어 철회해야 한다”고 밝혔다. 같은 당 박홍근 의원도 “이 시점에서 재정준칙을 만들면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이 생긴다”며 “국가재정운용의 발목을 스스로 잡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홍 부총리는 "재정준칙 때문에 재정이 제 역할을 해야 할 때 못하는 일이 없도록 탄력성 있는 준칙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여당은 "재정준칙 자체가 필요없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부동산시장 감독기구 설치 문제의 경우 더 외로운 상황이다. 기재부는 이 방안에 부정적이지만 청와대와 여당은 물론 국토교통부까지 "설치가 필요하다"고 압박하고 있어서다. 부동산시장 감독기구는 문 대통령이 지난 10일 “부동산 대책의 실효성을 위해 필요하면 설치를 검토할 것”이라고 지시한 후 급물살을 탔다. 금융시장을 감시 감독하는 금융감독원처럼 부동산시장의 집값 담합, 편법 증여, 대출 등 자금 흐름을 보는 역할 등이 거론됐다.
하지만 기재부는 △전세계에 부동산시장을 따로 규율하는 기구는 유례가 없다는 점 △지나친 시장 개입으로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는 점 등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홍 부총리는 20일 "개인적으로는 감독기구를 설치하는 것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홍 부총리의 리더십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며 "이번에도 기존 입장을 굽히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 향후 국정 운영에서 기재부 영향력이 크게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