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 기자] 어쩌면 우리 인생 속에서 패션은 부가적인 요소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인간의 기본 조건이 ‘의식주’라고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먹고사느냐의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에는 사회적 각인이 스며들어있다. 같은 아침을 맞이해도 누군가는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단정한 수트를 입고 집을 나서며, 누군가는 가볍고 시원한 티셔츠 차림으로 길거리를 누빈다.
개인적 성향이 아무리 뚜렷하다고 해도 공통분모는 자연스레 두드러지기 마련. 그런 의미로 패션 트렌드와 아이덴티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특히나 오랫동안 컬렉션 위에서 대중들을 유혹했던 디자이너들은 그 필요성을 강구하며 바라는 모습이다. 이 사회가 표력하는 ‘포용적 성장(Inclusive Prosperity)’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처럼 트렌드가 시대적, 공간적 정신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패션은 사회를 이룬다. 단순히 보편적인 의미가 아닌 집단 내 소속감과 지향점으로 변주해가는 과정.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스트리트 문화의 발전은 호화롭고 인상적이다. 스케이트보드 문화를 필두로 위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던 ‘스투시(Stussy)’와 ‘슈프림(Supreme)’. 우아하고 강렬하기만 했던 런웨이를 향해 그야말로 ‘정밀 타격’한 순간이었다.
각 브랜드의 설립자 숀 스투시(Shawn Stussy)와 제임스 제비아(James Jebbia)는 같은 지류에서 피어난 혁신가. 1994년, 스투시 NYC 매장에서 근무하고 있던 제임스 제비아는 브랜드의 로고 플레이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무작정 12,000달러를 손에 쥐고 나선 그가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유스 컬처’. 초기 스케이트보드 샵으로 시작했던 슈프림이 영 아이콘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브랜드 아이덴티티인 박스 로고는 열광적이지만 세련된 ‘힙스터(Hipster)’ 문화를 응시한다. 붉은 바탕에 흰 텍스트로 그려진 박스 로고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사회적 주류(Social Mainstream)’가 아닌 상징으로서 남고 싶은 그 야망 앞에 모두가 줄을 선다. 실제로 제비아는 지금까지도 슈프림을 ‘레이블’이 아닌 하나의 ‘장소’로서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이처럼 그는 패션이라는 장르가 사회적 파급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파급력은 분명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 지어지지 않는 듯했다. 기존에 출시했던 티셔츠, 코튼 후디, 캡까지 연달아 히트쳤던 그였지만 목마름은 여전했다. 슈프림의 차별화적인 협업 시스템은 이러한 비전을 관통한다. 문화적 스펙트럼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을 연결해 동시대적 가치를 발산하는 그들이다.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같은 스포츠 브랜드와 함께 손잡는가 하면 하이패션 브랜드 ‘루이비통(Louis Vuitton)’과 컬렉션을 이루기도 한다.
‘크래프트 푸즈 그룹(Kraft Foods Group)’의 ‘오레오(Oreo)’, ‘혼다(HONDA)’ 모터사이클, 악기 회사 ‘펜더(Fender)’까지. 정말로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 쉽게 접하는 요소들이라는 점에서 때로는 도전적으로, 때로는 감미로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협업의 흐름 앞에 슈프림은 의외로 처연하고 일관적이다.
영국의 슈퍼 모델 케이트 모스(Kate Moss)의 ‘캘빈클라인(Calvin Klein)’ 언더웨어 화보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자극 중이다. 물론 케이트 모스의 실루엣 또한 화려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받았던 점은 바로 빨간 박스 로고. 별별 걸 다 만드는 그들답게 프로모션조차도 이색적으로 그려냈다.
타 브랜드 광고에 불법적으로 홍보했다는 이유로 금방 판매 정지 처분을 받았지만 이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다소 부도덕하고 반항적이었던 마케팅은 슈프림의 협업 시스템을 구축해나갔으며 마니아들은 환호했다.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모노그램 패턴을 무단으로 사용해 법적인 제재를 받은 적도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후 슈프림이 패션계에서 몸집이 거대해지고 색깔을 갖추어졌을 때 루이비통과 정식적으로 다시 조우한 것.
2018년 8월, 일간지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가 발행되자마자 완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루 23만 부가 인쇄되는 신문이 단기간에 완판됐던 이유는 슈프림 광고가 실렸기 때문. 이날 그들은 2018년 FW 컬렉션 홍보를 위해서 뉴욕 포스트 커버에 브랜드 전면 광고를 내걸었다.
출근길 시민들은 수많은 일간지 중 오로지 뉴욕 포스트를 찾느라 애먹었고, 한 부당 1달러인 신문은 인터넷 경매 사이트 ‘이베이(eBay)’에 20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언론 일간지에 스트리트 브랜드가 뒤덮였다는 점을 봤을 때 유례없이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일측에서는 ‘쓰레기도 슈프림 로고만 들어있어도 사갈 지경’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이상향과 메시지. 기존 런웨이 위에서 콧대 높았던 디자이너 브랜드에 맞서 가볍고 단순한 브랜드도 소비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26년 지기 슈프림의 운영자 제임스 제비아는 언제나 말한다. 소비자들이 슈프림을 부담 없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이곳은 아직도, 여전히 스케이터를 위한 공간이다. (사진출처: 슈프림 공식 인스타그램,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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