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 대만 TSMC가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기로 결정하면서 삼성전자에도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TSMC를 굴복시킨 미국 정부는 세계 2위 삼성전자에도 “미국에 공장을 더 지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놓칠 수 없는 파운드리 시장인 만큼 삼성전자의 고민은 TSMC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TSMC 견제를 위해 미국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는 곧 중국과 척을 져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삼성 고위관계자는 “어떤 결정을 내리든 삼성 파운드리 사업엔 후폭풍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TSMC의 미국 공장 설립을 발표한 15일 삼성전자는 미국 추가 투자는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로, 아직 정해진 게 없다는 원론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다.
산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처한 복합적인 상황 때문에 결정이 늦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점유율 15.9%를 기록했다. TSMC(54.1%)에 이은 세계 2위다. 하지만 점유율 격차가 크다. TSMC의 고객들을 빼앗지 않고선 ‘2030년 파운드리 시장 세계 1위’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이다.
TSMC의 고객 중 다수는 애플, 퀄컴, AMD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이다. 삼성전자도 퀄컴 등의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지만 물량은 TSMC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TSMC가 2024년부터 미국에서 최신 공장을 가동하면 미국 업체들의 주문은 더 몰릴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미국 오스틴에 있는 파운드리 공장을 증설하거나 새로운 곳에 신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 지역언론엔 벌써 ‘삼성전자가 오스틴 공장과 3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의 대규모 공간을 새로 임차해 반도체 저장 공간을 증축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중국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없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이후 중국엔 파운드리의 잠재고객인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기업)가 우후죽순 생기고 있다. 지난해 12월엔 중국의 구글로 불리는 바이두로부터 인공지능(AI) 칩 물량을 수주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손을 들어주면 중국 공략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에 애꿎은 삼성전자만 타격을 받고 있다”며 “미국 요청을 뿌리칠 순 없겠지만 중국과의 관계를 감안해 시기와 방법을 고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