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전 이 땅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치명적 질병은 ‘장질부사’였다. “그동안 평양에 창궐한 장질부사의 환자통계를 보건대 일본인 972명·사망 189명, 조선인 135명·사망 19명, 외국인 1명·사망 없음. 계 환자 1098명, 사망 208명.” 1922년 11월 동아일보는 평양발(發)로 장질부사 발병 현황을 전했다. 통계수치로만 보면 당시 장질부사는 치사율이 20%에 가까운 무서운 병이었다.
‘호열자’ ‘장질부사’는 사라져가는 말지금은 사라져가는 말 ‘장질부사(腸窒扶斯)’. 이는 예전에 장티푸스(腸typhus)를 가리키던 말이다. 티푸스균이 장(腸)에 들어가 일으키는 전염병이란 뜻으로, ‘장’과 ‘티푸스’를 합성했다. 지금은 외래어(외국어)를 현지 발음에 맞춰 한글로 적으면 되지만 과거에 한자음을 빌려 쓰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바 ‘음역어’인데, 대개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든 말을 들여다 썼다. 장질부사 역시 중국에서 腸窒扶斯로 적고 [창즈푸쓰] 정도로 읽던 것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이 병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염병’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염병(染病)은 두 가지로 쓰인다. 하나는 글자 그대로 전염병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장티푸스를 가리킨다. ‘염병을 떨다’(엉뚱하거나 나쁜 짓을 하다)란 관용구도 생겼다. 감탄사 “염병할!”은 욕으로 하는 말인데, ‘장티푸스를 앓다 죽을’이란 속뜻을 담고 있다. 입말로 “옘병할”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콜레라도 장티푸스 못지않게 치사율이 높은 병이었다. 이를 한때 음역어로 ‘호열자(虎列刺)’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콜레라와 호열자는 발음이 많이 다르다. 이 말이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글자가 잘못 전해졌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즉 일본에서 ‘虎列剌’(호열랄)로 적고 [코레라]로 읽었는데 우리말로 넘어오면서 ‘랄(剌)’을 모양이 비슷한 ‘자(刺)’로 잘못 읽었다는 것이다. 한글학회에서 1957년 완간한 최초의 국어대사전 《조선말 큰사전》에도 ‘호열자(虎列刺)’로 실었다. 그 후 ‘호열랄’은 사라지고 우리말에서는 ‘호열자’로 굳어졌다.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에 ‘호열자’가 콜레라의 음역어로 올라 있다.
외래어 홍수 속에 다듬은말 빛 못 봐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2020년 새로운 전염병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이번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다. 지금은 외래어(외국어)를 굳이 한자음을 빌려 음역해 쓸 필요가 없다. 발음 그대로 한글로 옮기면 된다. 대신 코로나19 뉴스의 홍수 속에 외래어 사용도 비례해 크게 늘어났다. 이른바 ‘뜨는 말’들이다.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3월 15일 국립국어원에서 낸 보도자료는 살펴볼 만하다. ‘드라이브스루’를 쉬운 우리말 ‘승차진료(또는 승차검진)’로 제시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널리 쓰이게 된 외래어는 단연 ‘팬데믹’일 것이다. 이 말은 ‘(감염병) 세계적 유행’으로 다듬어졌다. ‘셧다운, 언택트 소비, 패닉 셀링, 코호트격리, 진단키트, 글로브월’ 등도 눈에 띈다. 이들은 각각 ‘가동정지, 비대면 소비, 공황 매도, 동일집단격리, 진단도구, 의료용 분리벽’으로 순화됐다.
하지만 현실 언어에서의 쓰임새는 여전히 외래어 위주다. 다듬은말이 설 자리는 그만큼 비좁을 수밖에 없다. 국어원에서 꾸준히 외래어를 다듬는 까닭은 우리말을 누구나 더 ‘알기 쉽게’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듬은말 자체에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언어의 시장’에서 어떤 말이 언중의 선택을 받아 우리말 속에 자리잡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