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을 받는 데 걸리는 기간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1심 접수부터 상고심 선고까지 걸리는 기간은 지난해 평균 15.6개월로 최근 2년 새 1.8개월 늘어났다. 재판을 받는 행위 자체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재판의 장기화는 민원인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2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민사소송에 걸리는 기간은 지난해 평균 19.6개월로 2년 전에 비해 3.3개월 더 길어졌다. 형사 재판도 상황은 비슷하다. 피의자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는 경우 2017년에 비해 1심과 2심, 3심 모두 각각 17일, 25일, 10일 늘어나 평균 처리기간이 15.2개월이나 됐다. 행정소송 기간도 2년 전보다 1.9개월 길어진 19.4개월이었다. 재판 장기화 현상은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두드러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법원은 사건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고, 증인 신문 등을 중시하는 공판중심주의가 자리잡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분석도 있다. 한 변호사는 “판사들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해진 데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가 없어지면서 업무에 매달리는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다”며 “재판은 일종의 대국민 서비스인데도 법원은 민원인의 고충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
"2심 끝난지 5년째 대법 선고 무소식
출장도 못 가고 정상생활 불가"국내 한 무역상사를 경영했던 A 전 회장은 2014년부터 시작된 형사재판을 7년째 받고 있다.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일부 무죄가 인정돼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언제 다시 구속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한다. A 전 회장은 “2심이 끝난 지 5년이 돼 가는데 상고심 선고는 감감무소식”이라며 “피고인 신분에 발목이 잡혀 해외 출국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판사 결원율 10% 돌파2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3년 전부터 구속 피고인의 형사 재판 상고심을 제외한 민사·형사·행정 소송 전체심급의 선고까지 걸리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소송 규모가 7500억원에 달해 산업계와 노동계의 관심이 큰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소송도 2012년 시작됐지만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1심은 노조 승소, 2심은 사측 승소로 하급심 판단이 엇갈려 노사 모두 대법원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행정처는 법원을 찾는 사건이 전문화되고 복잡해지고 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갈수록 사건의 규모가 커지고 쟁점이 방대해지면서 심리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더구나 최근 김명수 대법원장이 공판중심주의·변론중심주의를 강조하면서 법정에서 증인 신문이나 변론을 듣는 데 과거보다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행정처 관계자는 “최근 ‘충실한 심리’를 강조하는 풍토에서 감정, 증인신문 등 증거조사를 꼼꼼히 하는 사례가 많다”며 “한 사건에 관련된 부수 사건이 많아지면서 사건 처리 기간이 길어지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행정처는 법관 결원율(정원 대비 결원)이 높아지고, 실제 근무하는 법관 수가 줄어든 점도 원인으로 꼽았다. 현재 판사들의 정원은 판사정원법에 따라 3214명으로 정해져 있다. 2017년 4.3%였던 법관 결원율은 지난해 10%를 넘어섰다. 게다가 재판 외 행정 관련 전담을 맡거나 해외연수, 출산 및 육아 휴직 등으로 자리를 비운 판사들을 제외하면 실제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들의 업무 부담이 계속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소송 수는 오히려 감소그러나 일선 판사들은 법원 내부에 확산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문화가 원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과거와 달리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반복하면서라도 사건 처리율을 높여 조직에서 인정받고자 했던 문화가 젊은 판사들을 중심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수원지방법원은 지난해부터 판사들의 워라밸을 위해 자체적으로 매월 적정 선고건수를 정해두고 일하고 있다. 이 제도 시행 후 수원지법 판사의 78.2%가 “삶의 질이 개선됐다”고 답변했다.
김 대법원장이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2018년부터 법원 내 유일한 승진 코스였던 고등법원 부장판사 임명을 멈추면서 젊은 판사들의 의욕이 한풀 꺾였다는 지적도 있다. 판사들 간 경쟁이 사라지면서 ‘집단 정체’에 빠졌다는 설명이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한 부장판사는 “사건처리율은 인사평정 항목 중 하나인데 이제는 고법 부장제도가 없어지면서 굳이 옆 재판부와 경쟁해 빨리 선고를 내릴 필요가 없어졌다”며 “고법 부장 승진을 목전에 둔 중앙지법 부장판사들의 의욕이 상당히 떨어졌고, 지방에 있는 법원은 서울보다 더 심각하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인사 때마다 판사들 전보가 잦은 것도 고질적인 문제다. 법원은 매년 2월 법관 정기인사를 시행해 1000명이 넘는 판사가 법원을 옮긴다. 전체 판사의 3분의 1가량이 새 법원과 새 재판부로 떠나 업무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수개월에서 1년 넘게 재판을 진행하고 기록을 검토해왔던 사건이 잦은 인사로 ‘리셋’되는 셈이다.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의 한 변호사는 “일부 판사가 인사를 앞두고 일부러 증거조사 기일을 연기하는 등 사건 심리를 다음 재판부에 미루는 사례가 있다”며 “합의를 위해 시간을 벌어야 하는 일부 피고인을 제외한 대다수 재판 당사자에겐 불이익”이라고 말했다.
한편 법원에 접수되는 소송 건수는 최근 감소하고 있다. 본안 소송 기준으로 2017년 155만5602건, 2018년 146만2714건, 2019년 146만1218건으로 2년 연속 줄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