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한반도에는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를 비롯해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큰 ‘사건’들이 잇달았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쇄신에 힘쓰지만 결국 을사늑약을 거쳐 국권을 피탈당한다. 이 시기를 겪은 당대 지식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국 산문선》은 외세 침략으로 시작된 격동의 시대에 조선 지성인들의 시대정신이 담긴 문장들을 모았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한문으로 된 우리나라 고전 명문을 총망라한 아홉 권의 《한국 산문선》 시리즈 중 대한제국기 근세사를 겪은 사람들의 명문(名文)을 담은 별권이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잘 알려진 장지연의 ‘오늘 목 놓아 통곡하노라’, 최남선의 ‘3·1 독립선언서’, 서재필의 ‘독립신문 발간사’ 등 39편의 명문을 한글로 번역해 실었다. 안대회 이현일 이종묵 장유승 정민 이홍식 등 여섯 명의 한문학자가 편역했다.
편역자들은 10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의 글이 예상보다 치열하고 놀랍도록 솔직했다고 평가한다. 이들의 글은 평화와 정의를 배반한 일본 제국주의를 준엄하게 비판하면서도 ‘남의 파괴가 아니라 자신의 건설’을 목표로 삼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저자들은 “근대 국가를 만들고자 한 내부에서의 개혁 움직임이 결국 3·1운동의 역량을 마련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한다.
2부 ‘급변하는 사회’에선 학문과 예술, 과학과 기술 등 다양한 분야 선각자들의 대안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주 보는 ‘음슴체’가 서재필에 의해 발간된 독립신문에서 처음 쓰였고, 영화 ‘말모이’에 등장하는 우리말 사전의 배경을 이루는 것이 주시경의 ‘우리말 사용법’이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헬조선’이란 말도 조선의 구습과 폐단을 낱낱이 인식하며 이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조선사람들이 원조였다는 점도 책을 통해 드러난다.
3부 ‘난세의 인물상’에선 황현 김옥균 이건승 안중근 민영환 신채호 등 난세를 살아간 영웅들의 내밀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민음사, 460쪽, 2만2000원)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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