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뿌리를 내리는 문화인류학 전공 특성상 지난 연말도 중동에서 보내게 됐다.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를 거쳐 전운이 감도는 호르무즈 해협 남단 고대 항구도시 오만의 수르에서 신라를 만났다. 수르는 1200년 전 멀리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로 향하던 아랍 범선 다우(Dhow)가 출항하던 곳이었다. 당시 오만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 제조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동서 해양 실크로드 개척의 선구자였다. 오만 항구가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신드바드의 모험’의 무대인 것도 자연스럽다.
4월 초 불어오는 남서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해 수르에서 출항한 다우선은 인도 서부, 스리랑카, 동남아시아를 거쳐 6개월 뒤면 중국 남부 항구 광저우에 도착한다. 다시 북상해 항저우를 출발, 쿠로시오라 불리는 해류를 타고 흑산도 근해에서 우회해 대한해협을 거쳐 신라 왕경 경주에 당도했다. 오늘날 유조선이 중동의 원유를 싣고 오는 항로와 거의 일치한다. 신라까지 오는 해로는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드비가 845년 편찬한 《왕국과 도로 총람》이란 책에서 자세히 묘사해놨다. 고대 활발한 해상교역은 아랍 지리학자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에 신라가 6개의 섬으로 표시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상품이 한국인의 고급 소비문화를 촉진했으며 중동 아랍인을 매료시킨 신라의 수출품은 무엇이었을까. 이것 역시 아랍의 고전이나 《삼국유사》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돼 있다. 수입품은 오만의 유향, 예멘의 몰약, 아라비아 남부의 장미수, 안식향, 페르시아 카펫 등이었고 우리의 주요 수출품으로는 아랍 필사본 《왕국과 도로총람》에 11개 품목이 적시돼 있는데, 인삼을 필두로 비단, 검, 말안장, 담비 모피, 도기, 범포 등이 포함됐다.
오만 전체는 독특한 향내에 젖어 있다. 유향이다. 내뿜는 방향제가 아니라 연기를 피우는 훈향이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꽃이나 새, 음식, 복식이 아니라 한 나라를 상징하는 향취가 있다는 것은 깊은 삶의 토대와 대단한 문화적 품격을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명품 브랜드 향수를 파는 쇼핑몰에서도 유향을 피우고 있었다. 고귀한 향의 은은함과 독특함으로 승부하는 명품 향수가 이렇게 천대(?)받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점원의 대답이 걸작이다. “세상의 모든 향은 유향과 어울릴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발하는 법이니까요.”
이처럼 오만인에게 유향은 삶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2000년간 세상 사람들을 매료시켜온 최고의 교역품이었다. 남쪽의 살랄라 지방에서 자라는 유향나무의 수액을 채취해 건조한 송진 같은 우윳빛 알갱이다. 약용으로도 쓰이지만 훈향으로 사용되면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유교 등 거의 모든 종교 의례에 널리 선호됐다. 바로 ‘신의 향기’였기 때문이다. 세속에 찌든 진흙탕 같은 삶 속으로 한 줄기 향기로운 연기가 스며들면 누구라도 신이 왕림하는 신성한 체취라 생각했을 법하다.
당연히 오랫동안 유향은 금보다 훨씬 비싸고 귀한 사치품이었다. 로마시대 기록에 의하면 살랄라에서 채취한 유향은 홍해 연안의 아라비아 교역로를 따라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도착하고, 다시 로마로 향했다. 로마 시장에서 거래되는 유향은 산지 값의 거의 2000배 가치를 지니는 등 유향을 향한 인류의 집념과 애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 유향이 1만㎞의 대장정을 거쳐 신라 사찰에까지 도달했다 하니 그 가치와 의미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1966년 불국사 석가탑 밑에서 유향 세 봉지가 발견된 것이다. 호국불교의 위세가 등등하던 통일신라 전성기에 유향의 연기로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던 신라인들의 모습이 선하다.
어쩌면 오만은 1200년 전 우리에게 처음으로 국제무역을 가르쳐준 협력적 파트너였다. 이제 우리가 세계 최고의 조선술을 갖추게 됐고, 그 바닷길을 거슬러 그들에게 우리의 첨단 제품과 한류를 전하고 있다. 2020년 새해, 유향 한 줄기 피워놓고 한국 경제의 도약을 기원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인문학적 의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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