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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영 칼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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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증권시장에 가보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것이 있구나 생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2003년 5월 미국에 다녀와서 한 얘기다.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밥 먹고 사진 찍으러 미국에 가지 않겠다” “반미(反美)면 어떠냐”고 쏘아댔던 그의 입에서 ‘유연한 진보’라는 말이 나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달라진 노무현’은 말로 그치지 않았다. 행동으로 실천했다. 지지층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한 것만이 아니다. ‘지역균형발전’을 국정구호로 내걸고서도 수도권인 경기 파주시의 LCD 생산단지 건설을 법까지 바꿔가며 적극 지원했다. 경기 평택시에는 국제자유도시를 조성해 삼성 반도체 공장이 들어서게 도왔다. “(모두를 잘살게 하자는)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하면 무엇이든 채택하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이 측근과 지지자들에게 한 말이다.

그런 대통령이었지만 기업과 시장 등 현장을 의례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탐탁지 않아 했다. “현장에 가는 모습을 보이면 기업 격려에 좋겠다고 건의했지만 퇴짜 맞기 일쑤였다. 형식적인 것을 싫어했고, 기업들에 준비하는 수고를 끼치는 것도 꺼렸다.” 당시 청와대 담당관의 회고다. ‘보여주기식 행사’를 않겠다는 그의 소신은 확고했다. 언론사 경제부장들과의 오찬간담에서 “대통령이 시장을 방문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는 말이 나오자 정색을 하고 “안 가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라고 되받던 모습이 생생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자임하면서도 노 전 대통령과 다른 게 많다. 기업 현장을 대하는 모습부터가 그렇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등 기업 현장을 자주 찾아다닌다. 청와대는 지난주 문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을 돈 것에 맞춰 내놓은 자료를 통해 “문 대통령이 취임 후 2년 반 동안 지역현장을 방문한 횟수가 총 349회, 이동거리 5만9841㎞로 지구 한 바퀴가 넘는 거리에 이른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각계 인사를 청와대로 초대해 갖는 대화의 자리도 적지 않다. 취임 초 기업인들과의 ‘호프미팅’으로 화제를 모았고, 엊그제는 임기 후반을 맞아 300명의 각계 종사자들을 초청해 ‘국민과의 대화’를 가졌다.

이런 행사를 부지런하게 갖고 있지만, 문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과 다른 또 한 가지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현장을 챙기면서도 설계주의적인 정책기조를 초지일관(初志一貫)으로 고수하고 있다. ‘더불어 잘사는 경제’를 국정목표로 내걸고 일자리, 공정, 민생, 혁신 등의 구호 아래 펼친 정책들이 잇달아 ‘오발(誤發)사고’를 내는데도 시행착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취임하자마자 밀어붙인 최저임금의 가파른 상승과 비정규직의 대대적인 정규직 전환 등 ‘소득주도 성장’ 정책이 단적인 예다.

생산성을 넘어서는 인위적인 임금 및 고용조치 강요로 인해 기반이 취약한 영세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사업주 및 종사자들이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산업생태계의 핵심인 제조업과 한창 경제활동을 해야 할 40대의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대대적인 재정투입을 통해 급조한 고령층 단기 일자리와 가계에 대한 현금지원 확대로 통계를 포장하고 있지만, 상황이 심각함은 “뼈아프다” “안타깝다”는 말로 스스로 인정한다.

그런데도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기이하다. 문 대통령은 지난주 청와대 회의에서 정책 논란에 대해 “과거의 익숙함과 결별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며, 미래를 위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단언했다. 절대 바뀌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좋은 취지’를 내세워 설계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전형적인 ‘이념 정치’다. 이념 정치가 무서운 것은 시행과정에서의 문제를 인정하고 정책에 변화를 주는 것을 ‘패배’로 간주하고 극력 기피한다는 점이다. 2년 반 넘게 국정운영을 경험한 대통령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암담하다. 불통의 이념 정치를 포장하는 이벤트로 ‘현장’과 ‘소통’이 동원되는 것은 최악이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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