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홀(파5). 티샷이 페어웨이로 잘 나왔다. 284야드를 남겨둔 상황에서 페어웨이 우드를 꺼내들었다. 위기가 찾아온 게 이 때. 이미 6번(파4), 8번홀(파3)에서 버디 2개를 잡아낸 터. 한 번쯤은 위기가 올만도 했다. 상황은 심각했다. 공이 숲속으로 깊게 들어가버린 것이다. 껌을 씹으며 침착하게 경기를 하던 고진영(24)은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했다. 최소한 1타 이상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다. 50여미터 떨어진 그린위로 친 웨지샷 어프로치는 홀옆 2미터에 붙였다. 4온. 퍼팅은 그대로 홀컵으로 빨려들어갔다. 천금같은 파세이브. 경기 흐름은 이 때부터 고진영의 독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경쟁자들이 한 번도 고진영을 위협하지 못하는 사이, 고진영은 후반에서만 6타를 추가로 덜어내며 우승고지를 향해 질주했다. 타수 차는 좁혀지지 않고 계속 벌어졌다. 18번홀(파4). 2미터 짜리 버디 퍼트를 성공시킨 고진영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감사’세리머니로 승리를 자축했다.
고진영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72홀 노보기로 시즌 4승을 달성했다. 25일(한국시간) 막을 내린 LPGA투어 캐나다퍼시픽여자오픈(총상금 225만달러)에서다. 고진영은 이날 캐나다 온타리오주 오로라의 마그나 골프클럽(파71·6675야드)에서 열린 대회 최종일 4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만 8개를 잡아 8언더파 64타를 쳤다. 최종합계 26언더파를 적어낸 고진영은 2위 니콜 브로호 라르센(덴마크)을 5타 차로 밀어내고 시즌 네 번째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고진영의 최근 우승은 지난달 25일 열린 메이저 대회 에비앙챔피언십이다. 한 시즌 4승 챔피언이 나오기는 2016년 리디아 고 이후 3년만이다. 고진영의 독주체제가 시작된 셈이다. 개인통산으로는 6승째다. 고진영은 2017년 KEB하나은행챔피언십에서 비회원으로 첫승을 올린 후 지난해 1승을 올린데 이어 올해 네 개의 트로피를 추가했다. 고진영은 ”프로암 때 9홀만 돌아봐 코스를 잘 몰랐는데, 샷감이 좋았다. 캐디의 도움도 컸다. 이 감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고진영은 특히 대회 내내 보기를 단 한 개도 기록하지 않는 무결점 경기를 펼쳐보여 세계랭킹 1위의 기량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LPGA투어에서 72홀 노보기 우승이 나오기는 2015년 HSBC위민스월드챔피언십의 박인비(31) 이후 4년여 만이다.
샷감과 퍼트감이 모두 좋았다. 평균 260야드의 드라이버 비거리를 기록한 고진영은 80%의 티샷 정확도, 90%의 그린적중률(아이언 정확도)을 기록했고 총 28개의 퍼트를 했다. 퍼팅감이 집중력과 합쳐지자 시너지가 컸다. 중장거리 퍼트가 잘 들어갔다. 짧은 버디 퍼트는 14번홀 한 번에 그친 반면, 6번(3미터), 10번(5미터), 11번(2미터), 15번(4미터), 18번(3미터)이 모두 중거리 퍼트였다. 8번(10미터), 17번(7미터)은 장거리 퍼트를 모두 홀컵에 꽂아넣었다.
벙커에 빠졌을 때에도 빼어난 위기탈출 능력을 보여줬다. 네 번 벙커에 공이 들어갔지만 세 번 파로 연결시켰다. 그는 올 시즌에 앞서 “행복하게 경기하는 한해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그 말대로 그는 경기 내내 미소를 지었다. 캐디와의 대화도 생기가 넘쳤다.
이번 우승으로 고진영은 ‘1인자’의 지위를 한결 공고히 할 전망이다. 고진영은 전 부문에서 경쟁자들을 압도하고 있다. 세계랭킹 포인트 1위, 올해의 선수 1위, 상금 1위, 평균타수 1위, 다승 1위, CME글로브랭킹 1위 등이다. 아직까지 이 부문을 모두 독식한 한국 선수는 없다. 이 기세라면 한국인 선수 최초의 6개 주요 경쟁부문 전관왕도 현실이 될 수 있다.
박성현(26)과 허미정(30)이 11언더파 공동 20위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한국 선수들은 올 시즌 24개 대회에서 12번 우승컵을 가져갔다. 승률 50%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