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10월31일 개봉작 ‘완벽한 타인’ 준모 役
“나이는 많고 돈은 없고. 결혼, 레스토랑 다 네 돈으로 한 건데 얼마나 꼴 보기 싫겠냐?” ‘사랑꾼’ 준모(이서진)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영랑호(湖)를 두고 친구가 싸우든 말든 그의 관심은 오직 돌뿐이었다. “하트다. 연지 줄까? 경숙이 줄까?” 늘 넘치는 사랑으로 세상 여자를 품어온 준모의, 현재 사랑은 ‘금수저’ 세경(송하윤)이다. 세경의 도움으로 레스토랑을 연 준모는 장모에게 눈엣가시 취급 받는 ‘만년 실패’ 사업가다.
친구 석호(조진웅)의 집들이에 간 준모-세경 부부. 이 가운데 석호 아내 예진(김지수)은 식탁에 앉은 모두에게 일명 ‘휴대폰 잠금해제 게임’을 언급한다. 저녁 먹는 동안 휴대폰에 오는 전화, 문자, 카톡 등을 모두 공유하자고 제안한 것.
이에 세경은 준모에게 동참을 종용하고, 준모는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한다. “왜 웃어? 찔리는 거 있어?” 세경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명중한다. “찔리기는 무슨.” 식탁 위에 올라간 준모의 아이폰. 미봉책에 그친 위기는 높은 파고가 되어 준모를 덮친다.
영화 ‘완벽한 타인(감독 이재규)’은 입봉작 ‘역린’으로 스크린까지 활동 반경을 넓힌 이재규 감독의 신작이다. 감독과 배우의 인연은 꽤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MBC ‘다모’로 개개의 입지를 굳게 다진 두 사람은 약 15년 만에 ‘완벽한 타인’으로 재회했다.
이서진은 “스마트한 사람이니까 똑똑한 친구니까”란 말로 감독을 묘사했다. 연출은 배우 이서진이 작품을 고르는 제일 중요한 기준이다. 그런 이서진에게 이번 영화는 그가 신뢰하고픈 사람이 제안한 수년만의 스크린 복귀 기회였다.
10월18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2길 한 카페에서 만난 이서진은 “좋은 작품을 제안 받은 게 없어서 영화를 할 수 없었다”며 그의 시그니처 ‘보조개 미소’를 선보였다. 배우가 소리 내어 웃자 마주한 이도 함께 웃는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됐다.
이날 이서진은 ‘솔직한 남자’의 정석을 보였다. “크게 잘된 영화가 없다”는 말로 솔직함에 시동을 건 그는 “준모는 분석하기 어려운 애가 아니다”, “‘완벽한 타인’은 대본만 봤을 땐 좀 애매하다”, “난 예능인이 아니다”, “‘다모’가 없었으면 연기를 때려치웠을 수도 있다” 등의 대답으로 폭소를 모았다. tvN ‘삼시세끼’ ‘윤식당’ 시리즈 등에서 줄곧 봐온 TV 속 이서진의 재림. 툭툭 말을 꺼낼 때마다 배우, 예능인, 준모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홍보 활동 내내 ‘휴대폰 잠금해제 게임’에 부정을 내비친 이서진은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듯 “서로를 잘 모르고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굳이 속속들이 알아서 좋을 게 하나 없다”고 했다. 더불어 “서로에게 좀 무관심한 게 관계를 더 오래 지속시킨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배우 이서진을 속속들이 아는 건 어떨까. ‘완벽한 타인’부터 나영석 PD까지. 솔직한 그와 약 1시간(1hr) 동안 나눈 대화를 모놀로그로 재구성했다.
영화에 관해 어제오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덕분에 기분이 좋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관객 분들의 호응이죠. 우리가 찍고 우리가 재밌다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천만’ 넘으면 핸드폰 공개하겠다고 약속한 바람에 언론시사회서 900만을 희망했어요. 제가 크게 잘된 영화가 없어요. (웃음) 관객 분들이 많이 보시면 저야 좋죠.
그간 이재규 감독이 저한테 작품하자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근데 그 사람이 이번에 ‘완벽한 타인’을 제안하더라고요. ‘저 사람은 스마트한 사람이니까 똑똑한 친구니까 뭔가 확신이 있어서 제안했을 거야’란 생각이 스치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어떻게 연기로 옮길지 걱정이 컸어요. 다들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촬영이 시작되니까 노련한 배우들답게 노련하게 잘하더라고요. 다들 미친 듯이 잘하니까 촬영하는 내내 재밌었어요. 살이 붙는 느낌이었고, 빈 곳을 연기가 꽉꽉 채워주는 느낌이었어요. 연출도 좋더라고요. 영화를 본 후에야 ‘우리 영화가 인간의 감정을 이렇게 많이 담고 있었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 사랑, 우정, 배신, 갈등, 긴장. 없는 게 없는 거예요. 고부 갈등, 사회 문제도 있고요. 게다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휴대폰까지 나와요.
10년 전이라면 나오기 힘든 영화예요. 10년 뒤라면 식상한 영화고요. 딱 이 시기에 잘 맞는 영화 같아요. 현실을 잘 그려냈다고 할까요.
해진 씨 부부나 진웅이 부부보다 우리 부부 감정이 가볍잖아요. 아쉽지 않냐고 여쭈시곤 하는데, 사실 아쉬움은 없어요. 오히려 좋았어요. 20년씩 산 부부 역할을 하라고 하면 부담스러움에 손사래 쳤을 거예요. 태수(유해진)와 석호(조진웅)는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이 역할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든 배역들이었어요. 이재규 감독은 저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에요. 예능 속 제 어떤 모습을 준모에 덧입히고 싶었던 거 같아요.
‘준모 주위에 왜 여자가 많을까?’ 등을 생각했어요.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준모랑 저는 달라요. (웃음) 어쨌든 그 생각을 하면서 ‘준모는 평소에 참 생각 없고, 얕고, 진지한 걸 싫어하고’란 결론에 도달했죠. 진지한 거 싫어한다는 것만 저랑 비슷해요. 준모가 진지한 상황에서 한 번씩 농담 던져서 분위기 바꾸잖아요. 그것만 저랑 비슷해요. 사실 준모는 분석하기 어려운 애가 아니에요. (웃음) 다른 여자와의 진짜 관계가 안 나오니까요.
합숙하는 기분으로 촬영했어요. 같은 호텔에서 방만 다르게 썼거든요. 사우나에서 만나서 목욕하고, 출근해서 종일 같이 촬영하고, 끝나면 저녁 먹으면서 술 한 잔 하고, 하루 쉬는 날 있으면 같이 운동하고. (웃음) 덕분에 모든 배우와 친해졌죠. 같이 있을 때 연기 얘기도 많이 했어요. 촬영에 앞서 상황을 많이 만들었죠. 대본에 틈이 있으면 배우끼리 상의해서 채우곤 했어요. 특히 해진 씨는 뭘 그렇게 자꾸 만들어내던지. (웃음)
노는 것처럼 찍었어요. 식탁에 둘러앉아서 서로 얘기하다가 슛 들어가면 바로 연기예요. 대화와 연기의 구분이 크게 없었어요.
저는 작품 고르는 기준이 연출자예요. 감독을 봐요. 저한테는 진짜 제일 중요해요. 출연 결정을 내리면 그 이후엔 감독을 전적으로 믿어요. 대본이 모자라도 연출이 좋으면 해요. 사실 이 ‘완벽한 타인’은 대본만 봤을 땐 좀 애매해요. 근데 이재규 감독이니까 믿고 간 거죠. 이번에 좋은 배우들과 연기했어요. 하지만 배우를 보고 출연하진 않아요.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했어요. 이유요? 좋은 작품을 제안 받은 게 없어서 영화를 할 수 없었어요. (웃음) 한다면 신중하게 해서 영화를 오래하고 싶었고요. 전에 잘 안 됐잖아요. ‘또 안 돼서 진짜 영영 영화를 못 하면 어떡하지?’란 생각에 더 신중히 기다렸어요.
대중이 기대하는 이미지와, 실제 저 사이에 괴리가 사실 옛날엔 있었어요. 하지만 예능을 시작한 후엔 (웃음) 제 평소 모습을 TV에서 거의 다 보여드렸어요. 그래서 요즘은 사람들이 맨날 그래요. 화면이랑 똑같다고. 애들한테는 어디 시골서 밥 짓는 사람이에요. 저란 사람을 일부러 숨길 마음이 있던 건 아니지만 요즘은 되려 홀가분해요.
절 실장님 이미지라고 부르시는 분들이 계신데, 실장님 역을 했던 적이 진짜 없어요. 예능 출연이 그 멋있는 이미지를 깎지 않았냐고요? 안 좋게 생각하면 그런 생각도 가능하죠. 근데 저는 원래 뭐든지 다 좋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런 이미지를 가짐으로써 되려 더 다양한 역을 제안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옛날이라면 준모 역은 저한테 오지 않았을 거예요. 다 예능 덕이죠. 그리고 예능 이미지와 별개로 제가 옛날에 했던 게 있잖아요. 그 이미지는 항상 있어요. ‘아 얘는 이제 멋있는 건 안 어울려’는 사실 아니거든요. 오랫동안 해온 것과 지금의 모습이 만나 되려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요.
전 예능인이 아니잖아요. (웃음) 계속 할 거란 생각은 사실 안 해요. 언젠가는 멈추겠죠. 어쨌든 본업은 계속 하고 있고요. 그래서 그냥 요 시기라고 생각해요. 10년 전엔 제가 예능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10년 뒤는 어떨까요? 예능을 다섯 프로씩 하고 있진 않을 거 같아요. (웃음) 지금은 잠깐 지나가는 과정 중 하나죠.
예능 시작을 나영석 PD랑 했어요. 지금까지도 계속 같이하는 중이고요. 나영석 PD를 고집하는 이유는, 나영석은 알아서 방송을 잘 만들어줘요. 제가 카메라나 다른 걸 신경 안 써도 나영석은 알아서 다 잘해주니까 이제는 어떤 믿음이 생겼어요. 그리고 같이 오래 했잖아요. 여행도 맨날 같이 다니니까 너무 친해졌어요. 제일 편하죠. 아무튼 영석이는 저한테 뭘 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근데 아마 다른 예능은 분명히 대본도 있을 거고, 뭐 해달라고 할 거예요. 저랑은 안 맞는 거 같아요. 다른 예능 출연 제안도 사실 많이 오죠.
MBC ‘그 여자네 집’으로 이름을 알렸어요. 이번에 영화 속에서 준모가 영배(윤경호)한테 중간에 때려치우지 말고 뭐 하나 진득하게 하라고 하잖아요? 제 경우엔 사실 ‘다모’가 없었으면 연기를 때려치웠을 수도 있어요. ‘그 여자네 집’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때가 제 연기 인생 중 제일 답답한 때였거든요. 배역 제의는 많이 들어왔지만 제 맘에 드는 게 없었어요. 이름을 알렸지만 사람들이 다 아는 게 아니었고요. 어중간한 위치였어요. 사실 저를 아예 모르면 더 편하거든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까 그게 절 심적으로 힘들게 했어요. 이렇게 계속 애매하면 답답해 미칠 거 같은 느낌? 그땐 그랬죠.
차기작은 TV 드라마 ‘트랩’이에요. 영화 ‘백야행’ 박신우 감독이 연출을 맡았는데, 덕분에 비주얼적인 부분은 기대하셔도 좋을 듯해요. 제가 맡은 역할은 앵커예요. 다만 데스크에 앉아서 뉴스 하는 모습은 거의 없어요. 내일부턴 산에 올라가서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 해요. 액션 범죄 수사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아요. 웃음기가 빠진 이서진, 아주 그냥 만신창이가 된 이서진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웃음)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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