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9월19일 개봉작 ‘협상’ 태구 役
협상가 하채윤(손예진)이 그가 지금 누구와 통화하는 건지 묻는다. 브리핑 하나 없이 이뤄진 급작스러운 통화. 모니터 너머 민태구(현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인사가 늦었네. 민태구올시다.” 종결 어미 ‘-올시다’의 사용이 예사롭지 않은 민태구는 인질범이다. 인질을 볼모로 둔 그는 하채윤에게 정확한 관등성명을 요구하고, 미인 대회 자막에서나 볼 법한 신체 사이즈를 묻는 음담패설을 서슴지 않는다.
범인과의 ‘라포(신뢰 관계)’ 형성을 노력하는 협상가에게 소개팅과 소주 한 잔을 운운하는 그는 인질범이되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시시껄렁한 인질범이다.
그러나 ‘인질범’이다. “시발 끼어들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속내를 알 수 없는 물음표 속 인질범 민태구는 그가 요구한 한 점 거짓 없는 솔직함이 깨지자 불같은 화를 낸다. 결국 상황에 흥분한 민태구는 욕설과, 총알을 눈앞에 꺼낸다.
진실. 민태구가 바라는 건 오직 진실뿐이다. 대한민국 일처리가 순진하고 예쁘지 않은 걸 알기에 그는 인질극을 벌이고 하채윤을 협상에 끌어들인다. 그리고 관객은 쓰레기 같은 목숨 운운하는 남자와, 기회를 달라고 하는 여자를 마주친다.
배우 현빈과, 영화 ‘협상(감독 이종석)’ 속 민태구는 당연히 다르다. 온갖 음성적 범죄를 저지르는 국제적 조폭 두목과 다수의 전성기를 가진 유명 배우의 비교는 네모난 구멍 위에 동그란 조각을 얹는 것과 진배없다. 하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현빈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형용사는 ‘바르다’다. 민태구가 욕설을 내뱉을 때 관객은 순간 인간 민태구로부터 현빈이 떨어져 나오는 듯한 어색함을 느낀다.
“바르기 위해서 뭘 한 게 없다”고 말하는 현빈을 9월18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대중이 현빈에게 기대하는 선한 이미지가 한순간 변하지 않을 거 같다고 예상했다. 더불어 노력이 시간 속에 쌓이면 다른 이미지가 형성될 것이라고 했다.
앞서 배우는 영화 ‘꾼’ 개봉에 앞서 여유로움을 드러냈던 바 있다. 그 초연함이 ‘협상’ 개봉 때도 마찬가지냐고 묻자 현빈은 긍정을 간접 드러냈다. 흥행을 선물로, 그 반대는 그의 잘못으로 생각하는 배우와 약 1시간(1hr) 동안 나눈 대화를 모놀로그로 재구성했다.
가까이서 본 그는 1년 전 기억을 성의껏 더듬는 조곤조곤한 말투의 배우였다.
협상을 전면에 내세운 첫 한국 영화예요. 물론, 협상가가 뒤에서 도움을 주는 영화는 있었죠. 하지만 협상 테이블에서 활약하는 건 ‘협상’이 처음이에요.
협상가와 인질범의 일대일 대치를 시나리오에서 재밌게 읽었어요. 그리고 제가 연기한 민태구 캐릭터 캐릭터만 놓고 봤을 때, 뭐라고 그래야 될까요? (쌓는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두 손을 적극 활용하며) 뭔가를 쌓을 수 있는 게 많겠다고 생각했어요. 껍질을 갖다 붙이는 재미를 기대했죠. 역할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을 연기하면서 찾아갔어요.
민태구는 제가 연기한 첫 악역이에요. 재밌었어요. 다른 역할보다 제약이 적었던 듯해요.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현장을 만들어주신 감독님의 의도도 있었고, 이래저래 변주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역할이라서 재밌게 촬영했어요.
따로 몸을 키우진 않았어요. 다만 스타일은 고민했어요. 아무래도 외형이 주는 큰 영향이 있으니까요. 의상 팀, 분장 팀, 감독님과 상의하면서 어떤 스타일을 만들지 고민했어요. 민태구의 흉터는 그냥 악역으로 보이기 위해 그린 게 아녔어요. 태구 과거사가 만든 흉터예요. 흉터도 문신도 용병 시절에 생긴 거예요. 험악함을 기대한 건 아녔어요.
태구는 모든 걸 계산하고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그가 단서를 던지거나 데려오라고 주문한 사람과 얘기하기 전까지 관객은 ‘이게 뭐지?’ ‘얘 왜 이래?’ ‘얘 어떤 애야?’를 느끼죠. 어떤 때는 공손하게 얘기하는 거 같지만, 또 어떤 때는 따귀를 때려요. 뜬금없이 사람을 죽이고요. ‘얘 뭐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태구의 의도가 하나씩 던져질 때 그 시점을 같이 따라와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감독님께서는 현빈이란 배우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어요. 제 의외성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죠. 전 태구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질을 폭력적으로 깨우고, 뜬금없이 총을 쏘고. ‘이게 더 세보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아마 태구가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인물이라도 전 연기했을 듯해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며) 다만 중간에 뭔가를 넣을 거 같아요. 정 팀장 때리고 나서 눈빛이 잠깐이지만 살짝 바뀌었다가 돌아오는 등을 중간 중간 넣을 듯해요.
마침 눈빛은 이번 영화에서 제가 신경 쓴 부분이죠. 또라이처럼 보였으면 하는 지점이 있었고, 어떤 때는 등장인물을 웃으며 죽여보고 싶었어요. 계속 ‘쟤는 도대체 뭐야?’를 관객 분들께 드리고 싶었어요.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작품이었어요.
대화에도 고민이 많았어요. 상대방이 달라질 때마다 태구 말 패턴이 조금씩 달라져요. 하채윤과 대화할 때, 경찰 청장과 대화할 때, 윤동훈 사장과 말할 때, 국정원 요원과 대화할 때, 다 일부러 조금씩 다르게 했어요. 욕이 섞인 대사도 고민 중 하나였죠. 가족 단위 관객이 많이 오시는 때 개봉하는 작품이잖아요. 특히 하채윤이라는 인물에게 욕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태구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고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여자 관객 분들께는 그 욕이 다르게 다가갈까 봐 걱정했어요. 수위 조절을 했죠.
손예진 씨, 감독님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걸로 라포를 형성했어요. 사무실에서 리딩하고,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고, 그런 시간을 촬영 전부터 가졌어요. 촬영 때 서로 떨어져야 했어요. 예진 씨는 3층 세트장에서 찍고, 저는 지하 1층에서 했죠. 다행히 촬영 전 시간이 좋게 작용했어요. 떨어져 있어도 유대감이 형성됐고, 덕분에 연기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죠. 리허설을 많이 안 했지만, 편안함이 있었어요.
영화에서처럼 현장에서도 서로 못 만난 거 아니냐고요? 만났죠! 밥차에서 밥 먹을 때, 모니터할 때. 모니터 룸이 3층에 있었어요. 모니터 하러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고 했죠. 비록 한 신이지만 윤제균, 이종석 감독님께서 ‘국제시장’ 때 사용하신 촬영법이에요. 황정민 선배님께서 이산 가족 만날 때 이 방식으로 촬영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마 예진 씨가 힘들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태구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인물이지만, 하채윤은 태구의 행동을 받아서 리액션만 해야 했으니까요.
예진 씨와 동지애나 유대감을 가지며 촬영했어요. 서로 비슷한 고생을 했고, 나이대도 같고, 연예계 데뷔도 거의 비슷하고, 그런 것들이 편안함을 부른 거 같아요. 이번 작품으로 배우 손예진을 향한 궁금증이 많아졌어요. 예진 씨가 표현하는 방식을 보고 ‘다른 장르에서 다른 연기를 같이 했을 때 또 어떤 기대감을 줄까?’란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지금 예진 씨나 제 나이 또래에서 할 수 있는 멜로라면 또 다른 느낌이 있을 듯해요.
‘협상’은 제가 택한 도전 중 하나예요. 전부터 도전은 매번 해요. 계속 뭔가 다른 지점을 찾아요. 소재든, 이야기든, 캐릭터든, 제 나름대로 계속 다른 것을 해왔다고 생각해요. ‘공조’도 그렇고, ‘꾼’도 그렇고, ‘협상’도 그렇고, 앞으로 나오는 ‘창궐’도 그렇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도 그렇고, 계속 다른 모습과 다른 얘기를 전해드리고 싶어요.
운이 좋다는 생각도 해요. 어찌 됐든 참여하고 싶은 작품이 눈에 들어온 덕에 1년에 늘 한두 작품씩 꾸준히 해오고 있으니까요. 안 놓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있고, 뭔가 다른 것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란 생각에 하는 것도 있어요.
스케줄도 중요해요. ‘창궐’ 출연을 정해놓은 다음에 ‘협상’ 책을 받았거든요. ‘창궐’에선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동건이 형과 같이 출연하는데, 전부터 같이 해보고 싶었어요. 장동건 선배님은 현장에서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거든요. 선배님께서 연기하시는 걸 보면서 컸으니까요. 나중에 ‘창궐’ 때, 한 달 후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웃음)
많은 분들께서 저에게 ‘바른 배우’란 말씀을 해주시곤 해요. 혹은 ‘모범의 표상’이거나요. 근데 전 바르기 위해서 뭘 한 게 없는데. (웃음)
그게 한순간에 변하진 않을 거 같아요. 제가 만약 다음 작품에서 엄청 센 나쁜 역할을 해도 그 한 작품으로 제 이미지가 뒤바뀌는 일은 없을 거예요. 꾸준히 다른 것을 보여드리려고 해요. 시간이 지나고 그것이 쌓이면 다른 이미지 하나가 형성되지 않을까 싶어요. 연기 잘하는 배우도 제가 원하는 이미지 중 하나예요. 연기자면 누구나 바라죠.
카메라 앞에서 굉장히 치열하게 살아요. 고민도 하고, 후회도 하고,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하는 제 역할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크랭크 업 후에는 ‘내 일 다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 되면 선물이고, 안 되면 제 잘못인 거죠. 그리고 관객 분들의 관점이 다 다르시잖아요. 여러 맥락에서 과거에 초연함을 드러냈던 거 같아요. 좀 놔두고 있는 거죠.
(사진제공: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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