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갈등에 따른 혼란과 대량 살상의 한 세기를 지나 세계가 ‘안정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힘의 균형을 이루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지난 18일 백악관이 발표한 신국가안보전략(NSS)은 이런 현실주의를 반영했다.
이전 시대는 1917년 일어난 두 사건을 계기로 시작됐다.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의 1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과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다.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은 이념을 모방한 국가들을 낳았고, 수천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엔 전체주의, 냉전시대엔 공산주의로부터 세계를 구하는 ‘슈퍼 파워’로 등극했다. 다만 미국에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신성한 임무’를 부여한 윌슨의 신념은 때로 엄청난 비용을 야기했다. 한국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전쟁이 발발했고, 이념 갈등으로 국가가 분열됐다.
이념 대신 지정학적 갈등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는 공산주의, 진보주의,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나치즘 등 각종 이념에 시달렸다.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이념적 열정이 온 지구를 휩쓸었다. 이념 갈등은 마침내 풀리고 있다. 대신 혁명, 반란과 대(對)반란 진압 등 새로운 혼돈이 시작됐다. 내전이 끊이지 않고, 문화·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파괴가 일어나고 있다.
푸틴 대통령, 시 주석,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국제 질서는 1917년 이전으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무정부적인 국제 무대에서 주권 국가는 군사력, 외교력, 동맹에 기대 자국의 안보를 지켜야 한다. 이념은 중요치 않다. 새로운 시대엔 힘이 곧 정의다.
이념에서 힘으로의 전환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몰락이 증거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1950년대 6·25전쟁 후 미·중 대리전이 벌어지고 있는 한반도에선 중국 의존국인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표면적으론 북한의 핵 보유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전략적 이해관계를 따져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전쟁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국익 경쟁은 자연스러운 것"
혹자는 미국 중국과 러시아의 경쟁에 또 다른 세계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해관계를 놓고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NSS에 따르면 경쟁이 언제나 적대감을 갖거나 갈등을 수반하는 건 아니다. 경제력, 군사억제력의 균형으로 갈등이 전쟁까지 가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다.
1862년 프로이센 총리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수사(speech)와 다수의 결정이 아니라 철과 피”라고 했다. 트럼프의 목표도 완벽이 아니라 안정이고, 합의가 아니라 경쟁이 될 것이다. 미국이 성공적으로 경쟁하는 것이 갈등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상주의자와 인본주의자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노력한 이데올로기와 광신도는 수천만 명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이 글은 아서 허만 미국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이 ‘The New Era of Global Stability’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을 정리한 것입니다.
정리=추가영 기자 gychu@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독점제휴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