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사업 비리 '눈덩이'
전산업체 임직원, 국세청 입찰서
특정업체 끼워넣고 14억원 받아
[ 안대규 기자 ] 검찰이 법원과 국세청의 1900억원대 정보화사업에서 입찰 담합을 저지른 전·현직 공무원과 기업체 임직원 등 34명을 재판에 넘겼다. 이 가운데 15명은 구속됐다. 뇌물, 배임수재, 입찰방해, 변호사법 위반 등의 혐의가 줄줄이 적용돼 ‘비리 종합선물세트’를 방불케 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자유시장경제에서 입찰 담합은 살해와 같은 중대범죄”라며 “법원과 국세청뿐만 아니라 공공기관 전반에 확산된 입찰 담합 비리에 대해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스펙알박기·입찰 정보 유출 등 혐의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부장검사 구상엽)는 연말정산 때 국민이 활용하는 홈택스 등 국세청이 발주한 1400억원대 정보화 사업의 전산장비 납품 과정에서 특정 업체를 끼워주는 대가로 14억원대 금품을 받은 삼성SDS 부장 출신 K씨와 L씨 등 6명을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기소했다고 30일 밝혔다. 거래 상대 업체 측으로부터 수억원대 금품을 받은 납품업체 관계자 4명도 배임수재 등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대규모 사업에서 국세청이 세부적인 원가까지 검증하기 어려운 사정을 악용했다. 입찰 전 단계부터 돈을 빼돌릴 업체와 금액을 반영해 원가를 과도하게 부풀린 것이다.
검찰은 또 전자법정 시스템 구축 등 500억원대 법원 정보화사업과 관련해 입찰 내부 정보를 빼내주고 관련 사업을 수주하게 한 다음 7억5000만원대 뇌물을 수수한 법원행정처 공무원 4명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공무상비밀누설, 입찰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법원 발주 사업의 수주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금품을 받은 업체 관계자 등 5명은 변호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법원 내부 정보를 이용해 입찰에 참여하거나 ‘들러리 입찰’에 가담한 업체 관계자 등 15명은 입찰방해 등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이들은 특정 업체에 일감을 몰아주기 위한 맞춤형 입찰 공고(일명 ‘스펙알박기’)를 통해 다른 업체들은 입찰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40만~80만원짜리 국산 실물화상기 대신 500만원짜리 특정 수입 실물화상기만 납품할 수 있도록 고사양 제품을 요구한 것이다. 대가로 현금, 상품권을 받거나 법인카드를 받아 생활비로 사용하고 특정 모델명의 대형 TV, 골프채 등을 요구해 받았다.
“공정위 단계서 ‘잠자는’ 입찰 담합 많아”
이번 수사는 작년 11월 법원이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시작됐다. 당초 100억원대로 예상된 입찰 담합 규모는 수사 결과 500억원대로 불어났다. 수사 대상 기관도 법원에서 국세청으로 확대됐다. 기소된 35명 대부분은 2013년부터 비리를 저질렀고 2008~2011년 뇌물과 횡령 혐의도 상당했다.
법조계에선 “이제라도 비리가 드러난 것은 다행”이라면서도 “이번 비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공공분야 전반에 걸쳐 입찰 담합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상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때문에 공정위가 고발하지 않는 이상 검찰이 먼저 입찰 담합을 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은 입찰 담합이나 공소시효 1년 미만 사건에 대해 검찰이 수사할 수 있도록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아직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작년 입찰 담합으로 제재를 받은 사건은 30~40건이고, 이 중 절반가량인 10~20건만 검찰에 고발된 상태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아파트 하자보수 입찰 담합 등도 작년에 급증했지만 상당수 고발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전속고발권 때문에 공정위 단계에서 잠자고 있는 담합 사건이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 입찰 담합 고발을 늘리고 있다”며 “국회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검찰 수사가 활성화돼 입찰 담합 비리를 근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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