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에 이념·정파 낄 틈 없어
강남 집값 인위적 통제는 잘못
[ 박진우 기자 ]
“왜 이렇게 많이 왔어요.”
정순균 서울 강남구청장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찜통 옆을 지나 ‘현대순대국’에 들어서면서 이미 와 있던 구청직원들에게 한마디 했다. 그는 강남구청에서 이곳 영동전통시장까지 홀로 걸어왔다고 했다.
인터뷰 장소를 어렵사리 골랐다. ‘방이 있는 음식점’ 중에서는 정 구청장이 즐겨 찾는 맛집이 딱히 없어서다. 순댓국이 질릴 만도 한데 매주 비서실 식구들과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정 구청장이 특별 주문한 소머릿고기가 쟁반에 가득 담겨 나왔다. 젓가락으로 한입 베어 물자 잡내가 없으면서도 소머리 특유의 기름 섞인 육수가 새어나왔다. 정 구청장은 “전통시장에 있지만 낮에는 줄 서서 먹는 맛집”이라고 소개했다.
“강남엔 부자들만 살고 고급 음식점만 있는 줄 아는데 알고 보면 빈부 격차가 심한 동네입니다. 강남구에 전통시장이 딱 두 곳 있는데 여기도 잘돼야 하니 자주 옵니다.”
정치 입문하자마자 노무현 캠프 합류
정 구청장은 25년간 중앙일보 기자로 일하다 한화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16대 대통령 선거 1년 전인 2001년의 일이다. 그런데 막상 대선전이 시작되자 언론 분야 전문가가 없던 노무현 캠프에서 그를 필요로 했다. “후배인 이병완(전 대통령 비서실장)하고 정말 뼈빠지게 뛰었어요. 외인부대였으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정 구청장은 인수위 대변인을 거쳐 국정홍보처 차장으로 임명됐다. 민정수석을 맡은 문재인 대통령과 이때 처음 만났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캠프의 언론특보단장을 맡았지만 선거에서 졌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는 절치부심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인 2016년 10월부터 8개월 동안 아예 담당 지역인 호남에서 눌러 살 정도였다. 정 구청장은 “당시만 해도 그해 총선에서 국민의당 몰표가 나오는 등 반문(反文) 정서가 상당했다”고 회고했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후 사람들은 그가 장관급 관료를 지낸 만큼 공공기관을 맡을 것으로 봤다. 그런데 돌연 구청장 선거에 출마했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는 “6·13 지방선거 출마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오랜 기간 스스로 정치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배인 이병완 전 비서실장의 권유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선거가 끝난 뒤 이 전 실장은 “혹시 선출직 생각이 있으면 강남구청장에 나가세요. 더불어민주당이 한번도 단체장을 배출하지 못한 전통적인 보수의 아성에서 당선되면 한국 정치사적으로도 획기적인 일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처음에는 홍보처장까지 한 사람이 무슨 구청장을 하냐고 화가 나서 집으로 왔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강남에서 민주당의 외연을 넓힐 유일한 기회더라고요.”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출마를 결정했지만 단 한 번도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만큼 자신 있었다. 실제 선거에서 득표율 46.2%로 압도적인 1등을 했다.
구청장의 시간에 정파는 끼어들 틈 없다
술이 여러 차례 돌았건만 정 구청장은 술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임기를 시작한 뒤 한 달 만에 술을 끊었다. 정 구청장은 “구청장은 정치인이 아닌, 행정가에 가깝다”며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잠시 말을 멈추더니 쇼핑백에서 여러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열어 보니 주머니 안이 은박지인 휴대용 재떨이다. 길거리에 쓰레기통이 적다 보니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이 많아 약속이 있을 때마다 나눠준다고 했다. 정 구청장은 “구청장의 시간에 이념이나 정파는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슬슬 부동산 얘기를 꺼냈다. 같은 당 소속 박원순 서울시장의 재개발 제동 정책에 지역구인 강남구민의 불만이 적지 않다. 그 역시 부동산 문제에는 곤혹스러워했다. 정 구청장은 강남 재건축 완화가 곧 전국 집값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동의했다. 하지만 “강남 집값을 인위적으로 잡으려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강남을 들여다보면 아파트 대부분이 40년 가까이 됐어요. 강남구민의 주거복지 차원에서도 재개발은 언젠가는 해야 할 문제입니다. 강남 집값 안정을 위해 녹물 나는 수도꼭지에서 물 받아 먹으며 1960년대 노후 아파트에서 살아야 되나요.”
그런데 “박 시장과는 협의를 하시냐”는 질문에 “어제도 만났는 걸 뭐”라는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정 구청장은 “나나 박 시장도 50년을 내다보는 아파트를 짓자는 생각”이라고 했다. “아파트 경관과 스카이라인, 한강조망권을 고려해서 층고 제한도 완화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층고를 35층으로 일괄 규제하지 않고 단지 단위로 평균 35층으로 하는 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게 정 구청장의 설명이다. 예컨대 한 단지 내에서 한 동은 20층으로, 다른 동은 50층으로 경관을 고려해 층고를 조절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강남북균형발전에는 찬성하지만 ‘강남 역차별’은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강남을 한국 내 다른 도시와 비교할 게 아니라 뉴욕 맨해튼과 같은 세계 중심가와 비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남구가 지난해 낸 국세는 16조원이다. 광역지방자치단체를 포함해도 서울 경기 부산 다음으로 전국 4위다. 인천시 대구시의 세 배나 된다. 정부도 강남구를 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특화도시로 키워야 한다는 얘기다.
기자가 원하는 정보 주고 오보 안 쓰도록 해야
정 구청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 2대 국정홍보처장을 지냈다. 그는 취임 후 기자실을 없애고 모든 언론을 대상으로 한 개방형 통합 브리핑룸을 만들었다. “당시 언론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정 구청장은 “오해”라고 잘라 말했다. “직접 언론사를 찾아다니고, 기자들에게도 개인적으로 연락해 양해까지 구했어요. 제가 나간 후에 경찰청, 외교부 같은 곳의 독립기자실을 언론사와 상의 없이 없앤 게 화근이었죠. 거기서부터 틀어진 거지….”
그렇게 언론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던 노무현 정부 때였지만 “(국정홍보처장을) 참 편하게 했다”고 정 구청장은 회상했다. 그는 “노 대통령은 언론에 뭐가 나와도 야단치지 않았다. 대통령이 ‘왜 이거 못 막았냐’고 하면 어려웠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국정홍보처의 역할은 언론사에 기사를 빼거나 줄여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기자들이 원하는 정보를 주고 오보를 막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정홍보처 같은 컨트롤타워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 때도 똑같이 국정홍보처가 있었다면 광우병 시위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문재인 정부도 똑같이 정책홍보 컨트롤타워가 없다”며 “가짜뉴스가 돌아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독일을 예로 들었다. 정 구청장은 “독일은 통합브리핑룸에서 1주일에 한두 번 날짜를 정해 장관을 배석시켜 동시에 발표하고 질문을 받는다”며 “국정홍보처에서 정부의 모든 보도자료를 분석해서 보도시점과 내용의 강약 등을 조절하면 기자들도 편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민주당에 대해서도 불만이 적지 않았다. 정 구청장은 “돌아와 보니 혁신 정치를 한다는 민주당에서도 구태는 여전하다”며 “정치인들이 자기 이해관계에만 충실하고 미래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가 공천권을 쥔 시의원, 구의원을 수족 부리듯 하고 구민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고도 했다.
밤 10시께가 되자 쉴 새 없이 이어지던 기자 시절의 인연과 기억도 차차 마무리됐다. 북적이던 현대순대국집에서도 어느 새 손님들이 빠져나가 정 구청장과 취재진, 수행원들만 남았다. 잠깐 새 취재진과 악수를 나눈 정 구청장은 이번에도 수행원 없이 혼자 집으로 걸어가겠다며 식당문을 나섰다.
"강남을 뉴욕 맨해튼처럼 '품격 도시'로 만들 것"
정순균 강남구청장의 정책 슬로건은 ‘품격 강남’이다. 강남을 뉴욕 맨해튼이나 런던의 시티오브런던 같은 세계적인 도시 중심가로 만들겠다는 것이 정 구청장의 포부다.
정 구청장은 경제와 복지, 소통에 예산과 노력을 집중 투자하고 있다. 우선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떠난 테헤란로를 ‘스타트업 밸리’로 바꾸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역삼로에 1980㎡ 규모 스타트업 밸리를 조성해 35개 기업을 지원한다. 창업 공간은 물론 대기업 등 투자자 연계와 해외 마케팅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정순균 강남구청장 약력
△1951년 전남 순천 출생
△서울 경희고 졸업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1978년 중앙일보 기자 입사
△16대 노무현 대통령후보 언론특보
△2003년 국정홍보처 차장
△국정홍보처장
△2006년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18대 문재인 대통령후보 언론특보단장
△19대 문재인 대통령후보 언론고문
△민선7기 강남구청장
■정순균 구청장의 단골집
현대순대국 국밥에 가득 담긴 쫄깃한 소머릿고기 일품
서울 논현동 영동전통시장 안에 있는 현대순대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한우소머리국밥(1만원)과 순대국밥(7000원)이다. 푹 고아낸 육수에 밥을 말아 기본 반찬으로 나오는 깍두기를 함께 먹으면 감칠맛이 느껴진다. 국밥에 가득 담겨 나오는 쫄깃한 소머릿고기는 새우젓과 잘 어울린다.점심 식사로 국밥을 주로 먹지만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현대순대국을 찾는 사람들은 한우소머릿고기(대자 3만6000원)와 돼지머릿고기 모둠(대자 2만5000원)을 안주로 즐긴다. 돼지머릿고기 모둠을 시키면 머릿고기와 함께 편육, 순대가 한 접시에 같이 나온다.
근처 업무용 빌딩들이 빽빽이 늘어선 영동전통시장 한가운데 있어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특히 많이 찾는다. 점심시간엔 예약이 안 돼 오전 11시50분에 가도 20~30분을 기다려야 할 정도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