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받을 게 빚밖에 없다”는 이유로 상속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서울가정법원을 통해 이뤄진 상속포기와 상속한정승인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상속 시 적극재산(재산·채권 등) 뿐 아니라 소극재산(채무·유증 등)도 물려받게 되는데, 소극재산이 적극재산보다 많을 경우 상속권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상속포기다. 반면 한정승인은 상속받은 재산 한도 내에서만 피상속인의 빚을 변제하는 것이다. 가령 부모가 재산 1억원과 빚 3억원을 남기고 사망했을 때, 자녀가 한정승인을 신청하면 3억원의 채무 중 물려받은 재산 금액에 해당하는 1억원만 상환하면 된다. 경기악화 등이 이같은 현상의 주된 원인으로 꼽혀 ‘불황의 어두운 단면’이란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상속포기 28% 급증
13일 서울가정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총 3915건의 상속포기와 4313건의 한정승인이 일어났다. 2009년에 상속포기가 2515건, 한정승인은 2590건 발생한 것과 비교할 때 10년 동안 각각 55.7%, 66.5%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 큰 폭의 오름세를 보였다. 상속포기의 경우 2014년 3401건에서 2017년 3048건까지 하락하더니, 2018년 3915건으로 28.4% 뛰어올랐다. 한정승인도 이와 비슷한 흐름을 보이며 작년 26.2% 증가해 4000건을 돌파했다.
전문가들은 ‘불황의 여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병태 KAIST 경영학과 교수는 “부모 재산이 많으면 상속을 포기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면서 “최저임금 인상 등 소득주도성장으로 자영업자 등이 직격탄을 맞아 빈곤층으로 떨어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빈곤층 가구소득은 전년보다 17.7% 줄어들어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을 기록했다. 임시직 일자리가 감소하고 자영업이 부진하면서다. 1997년 위환위기 직후에도 상속포기 등이 급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한정승인이 증가한 것은 기업의 어려움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형 법무법인의 한 상속전문 변호사는 “주로 피상속인이 기업체를 운영해 채권 채무관계가 복잡한 나머지 상속을 받는 것이 이득이 될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속인들이 한정승인을 신청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법원에 파산을 신청한 기업이 역대 최다를 기록하기도 했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작년 초 상속포기 등에 필요한 서류 기준을 완화한 것도 증가세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가족 간 소통 단절로 어려움 가중
최근 가족들 간 소통이 단절되면서 상속포기와 한정승인을 신청하기까지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한 60대 남성이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찾았다. 오랜 기간 연락 없이 지내던 여동생이 2달 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동생이 배우자와 자녀도 없고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신 상황이라 본인과 나머지 형제들이 상속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장기간 왕래가 없던 여동생의 정확한 재산 내역을 알지 못해 상속포기를 해야 할지 말지 난감해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관계자는 “이혼이나 가출 등 다양한 사유로 오랜 기간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사망 소식을 듣게 됐다면서 상속포기 관련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상속인이 상속포기를 받는 순간 피상속인의 빚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후순위 상속인에게 전달된다. 자녀가 상속을 포기하면 손자녀에게 빚이 상속돼, 4촌 이내 친척들도 모두 상속포기를 해야 ‘빚의 대물림’이 해소된다. 하지만 본인의 상속포기 사실을 친적들한테 알리지 않아 다른 친척이 빚을 덤터기쓰게 되는 상황도 종종 빚어진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