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채지형의 구석구석 아시아 (6) 인도 바르칼라
고즈넉한 해변에서 요가·명상…누가 인도를 소란스럽다 했나
인도를 생각하면 복잡한 거리와 소음이 떠오르겠지만, 바르칼라(Varkala)는 다르다. 인도에 대한 선입견을 단번에 날려줄 정도로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는 다른 휴양지와 비교를 허락하지 않는다. 보면 볼수록 한없이 맑고 투명한 빛을 뿜어내는 아라비아해. 바르칼라에 가면 왜 그곳이 인도 허니문 일번지인지 단번에 알게 된다.
절벽 위에서 바라본 눈부신 바다 풍경
바르칼라는 남인도 케랄라주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해외 여행 잡지에서 꼽는 ‘인도에서 꼭 가봐야 할 휴양지 베스트 10’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명하다. 외국 여행자뿐만 아니라 현지인에게도 사랑받는 여행지여서 바르칼라로 허니문 오는 인도 커플도 적지 않다. 게다가 2000년 역사를 지닌 힌두교 성지인 자나르다나 사원이 있어, 성지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인도에서 도시를 이동하는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기차. 기차를 타고 바르칼라역으로 향했다. 바르칼라역에서 바다가 보이는 마을까지는 약 2㎞ 떨어져 있었다. 오토 릭샤를 타고 10여 분 오르막을 달리니 헬리콥터 착륙장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르칼라 여행의 출발지였다. 아라비아해에서 바람이 훅 달려들었다. 공기가 달랐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그러나 햇살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비수처럼 꽂히는 햇살 때문에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 굽이쳤다.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눈과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이마의 주름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다가, 그것도 끝도 없는 바다가 발밑에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지금까지 바다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생전 처음 바다를 본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뭔가 익숙하지 않은 바다였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각도였다. 바다를 바라볼 때 해변에서 같은 눈높이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바르칼라에서는 절벽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기 때문에 바다가 더 장엄하게 다가왔다. 사막 꼭대기에서, 끝없는 모래 바다를 보듯 더없이 광활해 보였다.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바르칼라의 첫 번째 매력은 절벽 위에서 바라본 바다 풍경이라고 정했다.
요가와 크리켓, 모래사장 드로잉까지
바르칼라의 두 번째 매력은 아침에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온 세상을 비춰주는 낮 시간도 좋았지만, 마음에 오래 남은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 눈길을 먼저 사로잡은 이들은 요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요가가 인도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지만, 여기에서 요가를 하리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나 홀로’ 요가를 즐기는 이부터 단체로 요가를 하는 이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절벽 위 거리를 거닐다보니 요가를 위해 바르칼라에 머무는 이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길거리 상점에서는 요가 매트를 팔고 있었고, 호텔에서는 자체적으로 요가 클래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요가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학원도 적지 않았다. 바르칼라에서 해 뜰 무렵이면 편안한 옷차림으로 바다에 나갔다. 요가 하는 사람들을 따라, 바다의 에너지를 받으러. 온몸을 펴고 내 몸을 만나는 시간, 요가가 곧 명상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아침 풍경 중 하나는 바다에서 크리켓을 하는 인도 사람들이었다. 크리켓은 공을 던지고 배트로 치는 스포츠로 야구와 비슷하다. 인도 사람들이 크리켓에 열광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해변에서까지 크리켓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넓은 해변에서 동네 청년들이 모여 신나게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은 구경만으로도 웃음 짓게 했다. 그들 덕분에 해변이 싱그러운 에너지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또 다른 생기 넘치는 풍경은 고깃배가 보여줬다. 바르칼라는 어촌 마을이어서 부지런한 어부들이 산다. 아침 6시쯤 나가면 밤새 놓아둔 그물을 끌어올려 해산물과 생선을 올리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어부가 바다에서 건져 올린 보물들은 매일 달랐다. 손바닥 크기의 게부터 팔뚝만 한 생선까지 어종도 여러 가지였다. 즉석에서 열리는 경매도 흥미로웠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흥정하는 모습은 아침 분위기와 다르게 더없이 진지했다. 이방인 눈에는 더 재미있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모래사장에 멋진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도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에 그림이 사라지는데도, 하염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바다에 온 몸을 던지며 서핑하는 사람들, 큼지막한 개와 함께 해변을 가르며 조깅하는 사람까지 수없이 다양한 이들이 바르칼라 해변을 수놓고 있었다.
단순하지만 충만한 바르칼라 생활
더없이 평화로운 바르칼라의 하루는 단순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절벽에서 해변으로 내려간다. 아침 산책을 하는 이들과 ‘굿모닝’ 눈인사를 나누며, 해변을 하염없이 걷는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작은 모래의 앙증맞은 기운을 즐기며, 푸른 바다 끝 수평선을 바라본다. 마음에 드는 자리가 나타나면 천 조각을 펼치고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러다 슬슬 지겨워지면 선글라스를 코에 걸치고 책을 펼친다. 서서히 기분 좋은 아침 햇살이 떠오르고 몸도 슬슬 달아오른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면 바닷속으로 풍덩 빠진다. 수심이 깊지 않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파도타기를 즐긴다.
한바탕 파도타기를 즐긴 뒤에는 해변에 와서 잠시 눈을 감는다. 철썩이는 파도가 밀려든다. 부드러운 모래는 몸을 따스하게 감싸고 시원한 파도 소리는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해변을 즐긴 뒤에는 야자수를 마시러 간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들러 단골이 된 길거리 코코넛 가게.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를 자랑하는 할아버지가 코코넛 꼭지를 힘차게 잘라준다. 건강해질 것 같은 코코넛 한 통을 깨끗하게 비운 후에는 “말라이(코코넛 과육) 주세요”라고 말한다. 코코넛의 하얗고 탱글탱글한 속살이 나타난다. 코코넛 옆을 잘라 천연 숟가락까지 만들어주면, 미소와 함께 “단야밧(고맙습니다)”이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할아버지 입가에 떠오른 커다란 미소를 받고 나면, 어느새 아침 시간이 훌쩍 흘러 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바르칼라의 아침이다.
바르칼라로 순례 오는 힌두교 사람들
해변을 거닐다 보면, 순례자도 어렵지 않게 만난다. 바르칼라 해변 남쪽에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힌두 사원 자나다나 스와미 템플(Janardhana swami temple)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고, 바다에 공양물을 띄워 보낸다. 한쪽에서는 물을 온 몸에 끼얹는다. 힌두교 사람들은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그동안 지은 죄가 씻긴다고 여긴다. 바르칼라는 ‘죄를 없애준다’는 의미의 ‘파파나삼(Papanasam) 해변’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원 앞은 해변 한복판보다 북적인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두 손을 가지런히 가슴 위에 모으고 머리 숙여 기도하는 모습은 더없이 경건하다. 바르칼라 해변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스마트폰 세대인 젊은 청년부터 허리 굽은 어르신까지, 델리에서 순례여행을 온 인도 현지인부터 서핑하러 온 미국 여행자까지, 하나의 카테고리로 엮을 수 없는 여러 결의 사람들이 해변을 함께 즐겼다.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사는 이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한 공간을 공유하는 모습이, 마치 도톰한 동화책을 보는 즐거움을 안겨줬다.
화룡점정은 매일 다른 일몰
바르칼라의 매력 중 단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일몰이다. 화룡점정이라는 사자성어가 딱 맞다. 여행자든 현지인이든 해가 바다 위로 떨어질 시간이 되면, 마치 시간 맞춰 극장에 가듯 절벽 위에 올라 일몰을 기다린다. 매일 다른 모양과 묘한 빛깔의 하늘을 보여주던지, 놀라움 가득한 일몰이었다.
바르칼라에 도착한 날은 분홍빛으로 하늘이 물들더니, 다음날은 회색빛이 하늘에 깔렸다.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들면서 비가 쏟아진 날도 있었다. 바르칼라에 머무른 1주일 동안 단 하루도 같은 일몰을 보지 못했다.
마지막 날 일몰을 보면서 우리네 인생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바르칼라 일몰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듯 우리의 하루하루도 다른 그림으로 채워지고 있구나 싶었다. 바르칼라의 일몰을 그리워하며, 오늘이라는 하루에 작지만 따스한 그림 한 장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르칼라(인도)=채지형 여행작가 travelguru@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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