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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 피해 보상" 비판 받았지만…日과 국교정상화 후 고도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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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51) 한일 국교 정상화




이웃효과

1911년과 2010년 사이 세계에서 1인당 실질소득이 상대적으로 가장 크게 증가한 나라를 꼽으면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 7개국이다.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두 그룹으로 나뉜다. 동아시아의 한국, 일본, 대만은 1945년 이전에는 하나의 경제권이었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도 하나의 경제권이다. 같은 기간 1인당 실질소득이 상대적으로 가장 작게 성장한 나라를 꼽으면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3개국이다. 이 역시 인접한 나라들이다.

한 나라의 경제는 홀로 발전하지 않는다. 이웃 나라와 함께 하나의 경제권으로 발전한다. 좋은 나라가 이웃이라면 거기서 발생하는 정(正)의 효과는 측정할 수 없을 지경이다. 1950년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 경제의 성장은 세계에서 가장 급속했다. 이후 지금까지 일본은 세계 2위 내지 3위의 경제 대국으로서 그 국제적 위상을 지키고 있다. 그 일본이 발산하는 ‘이웃효과’를 배제하고서 한국의 경제성장이나 경제체제의 특질을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경제학은 그에 관해 알지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높은 장벽

독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일본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유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일본을 중심으로 구축한 동아시아 방위체제에 들기를 거부했다. 미국이 준 원조로 일본의 공산품을 구입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뿌리쳤다. 그는 일본이 한국에 놓고 간 재산을 찾으러 다시 한국에 들어올 것으로 믿었다. 그는 대한민국을 무시하고 재일 동포를 북송하는 일본의 거만한 자세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일본 인식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신생 독립국의 국격을 지키고 국민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큰 역할을 감당했다.

뒤이은 장면 정부는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할 의욕을 보였지만 5·16의 발발로 박정희 정부에 그 역사적 과제를 넘겼다. 1961년 11월 제6차 한·일 회담이 열렸다. 그렇지만 국교 정상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그 이후로도 4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만큼 국교 정상화를 저해하는 장벽은 높고 험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피해 보상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1952년의 제1차 회담에서 8개 항의 청구권을 제출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것의 토론 자체를 거부했다. 일본 정부가 토론에 임한 것은 1961년의 제6차 회담에서였다. 8개 항의 청구권이 어떤 내역인지는 2005년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문서를 공개함으로써 비로소 소상하게 알려졌다.


금과 자산의 원상회복 요구

제1항은 일본이 조선은행을 통해 반출한 금 249t과 은 67t을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통상의 상업적 거래로서 적법하게 매취됐다는 이유에서 이를 거부했다. 제2항은 한국인이 보유한 일본의 각종 체신예금을 반환하라는 것인데, 일본 정부는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제3∼5항의 청구 요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에 본사와 본점을 둔 금융기관과 회사가 보유한 일본 지점의 재산과 1945년 8월 9일 이후 이들이 일본으로 이체하거나 송금한 각종 유가증권과 금품을 반납하라는 것이었다. 식민지기에 일본과 조선은 법역(法域)을 달리했으며, 이에 조선에 있는 금융기관과 회사는 조선법에 근거를 둔 조선의 법인이라는 근거에서였다. 다른 한 가지 근거는 미군정이 이들 기관과 회사의 주식을 미군정의 소유로 귀속시켜 한국 정부에 이양했기 때문에 일본에 있는 지점의 재산도 주식 지배 논리에 따라 한국 정부에 귀속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한국 정부의 주장에 대해 일본 정부는 조선에 있는 금융기관과 회사는 일본 의회가 제정한 법체계에 근거를 둔 일본인 소유의 기관과 회사였으며, 이에 종전에 임해 일본 회사가 본·지점 사이에 행한 각종 거래에 대해 한국 정부가 원상회복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고 반론했다. 나아가 미군정의 귀속 조치는 어디까지나 미군정의 관할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일본에까지 미칠 바는 아니라고 했다.

미지급금과 보상금

제3∼5항의 다른 주요 청구는 군인, 군속, 노무자에 대한 미지급금과 사망·상해에 대한 보상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미지급금을 포함해 보상금으로서 생존자 1인당 200달러, 사망자 1인당 1650달러, 부상자 1인당 2000달러를 기준으로 총 3억6400만달러를 청구했다. 일본 정부는 미지급금에 대한 적절한 처리가 필요함에 동의한 다음, 생존자에 대한 보상은 일본에서도 행한 바 없고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은 당시에 이미 관련 원호법에 따라 행했다고 반론했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한국에 지급할 각종 미지급금이 대략 2000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되는데, 그것마저 일본이 한국에 두고 온 22억달러의 재산을 고려해 한국이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1957년 일본은 한국에 두고 온 그들의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일본 정부는 그 사실을 한국 정부에 환기시켰다.

정치적 타협

청구권을 둘러싼 양국의 입장에는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한국이 제시한 8개 항은 하나하나 논박됐으며 한국은 그에 대해 반론하지 않았다. 아니, 반론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양국 정부는 청구권의 명분과 금액에 관한 정치적 협상을 시도했다. 명분과 관련해서는 청구권의 테두리를 유지하되, 그와 액수를 구분하지 않은 경제협력자금을 포함한다는 합의가 도출됐다. 액수와 관련해서는 일본 정부가 10년에 걸쳐 3억달러의 원조와 2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이외에 일본 수출입은행이 1억달러 이상의 상업 차관을 제공하는 것으로 타결을 봤다.

1964년 이 같은 협상 내용이 공개되자 야당, 언론, 대학가는 밀실 흥정에 굴욕 외교라면서 거세게 반발했다. 그해 6월에는 4·19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대규모 군중 시위가 벌어졌다. 민간정부로 막 이행한 박정희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그는 일본 정부에 청구권 8개 항을 납득시킬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와의 협상 결과를 국민에게 납득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과 지식인의 행태에 분노했으며, 점차 권위주의 정치로 선회했다.

이윽고 1965년 6월 한·일 양국 정부는 관계를 정상화하는 기본조약과 4개의 부속 협정에 서명했다. 1963년부터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의 경주를 개시했다. 한편의 원동력은 일본에서 건너오고 있었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와 뒤따른 인적, 물적 교류의 활성화는 이후 한 세대에 걸친 고도성장 체제의 불가결한 요소를 이뤘다. 고도성장의 주역들은 열린 마음으로 경제 대국 일본이 발산하는 이웃효과를 맘껏 누리는 지혜를 발휘했다.

수수께끼의 정신사

2005년 한국 정부가 공개한 외교문서를 읽는 역사가의 심정은 여간 착잡하지 않다. 청구권의 논리는 빈약했다. 땅속의 금은 원래 고종 황제의 소유였다. 황제는 그 채굴권을 영국과 미국의 금광업자에게 팔았다. 총독부는 그들의 권리를 그대로 인정해 줬다. 일본은행이 그들에게 사들인 금을 후대의 한국 정부가 반환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식민지 조선이 일본과 분리된 독자의 법역이었다는 주장도 성립하기 힘든 폭론(暴論)이었다. 민간이 보유한 일본의 예금, 보험, 연금, 미불임금은 확정적 채권으로서 애당초 외교적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다. 국교 수립 이전이라도 일본 정부와 교섭해 채권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한데, 한국 정부는 그것을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어렵사리 타결을 본 협상안에 대한 야당, 언론, 지식인, 대학가의 반응도 납득하기 힘들다. 그들은 ‘적어도 20억달러 이상은 받아내야 하는데 고작 3억달러라니’ 하면서 분노했다. 식민지 피지배의 역사를 돈으로 청산한다는 발상은 우리 문화의 어느 구석에 근거를 둔 것일까. 1957년 일본이 대한(對韓) 청구권을 포기할 때 한국도 대일(對日)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국 풍의 외교는 진정 불가능한 것이었나. 1960년대 한국의 정치와 지성이 일본과의 교섭에서 드러낸 물질주의 편향은 그 내력을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의 정신사이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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