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업무와 자살·질병 사고의 인과관계' 폭넓게 인정
'추정의 원칙' 적용…인정률 '쑥'
[ 조아란 기자 ] 직장인 A씨는 2015년 갑작스레 부서가 바뀌면서 우울증이 생겨 목숨을 끊었다. 생소한 업무를 지시받다 보니 중압감을 느꼈다는 게 주변의 얘기였다. 근로복지공단은 A씨가 평소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스트레스에 취약했고 퇴사 후 한 달 뒤에 자살했다는 점을 들어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은 최근 A씨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처분 취소소송에서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업무와 우울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산재가 맞다고 판단했다.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폭넓게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잇달아 나오면서 산재 인정범위가 대폭 확대되고 있다. 3일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작년 산재 인정률은 91.5%로 사상 처음으로 90%대에 진입했다. 작년 접수한 사건 10개 중 9개가 산재로 인정됐다는 뜻이다.
접수 사건 10개 중 9개 산재 인정
산재는 절단 사고, 추락 등을 의미하는 사고재해와 업무로 정신질환, 허리디스크 등이 생기는 질병재해로 나뉜다. 사고재해와 달리 질병재해는 원인이 복합적일 때가 많아 산재 인정률이 30~40%대에 머물렀지만 2016년 44.1%에서 2017년 52.9%, 2018년 63%로 3년 새 20%포인트나 올랐다. 이에 따라 작년 전체 산업재해자 수는 10만2305명으로 2017년 8만9848명에 비해 13.8%(1만2457명) 늘었다.
공단은 “2017년 9월부터 ‘추정의 원칙’을 도입하면서 산재 인정범위가 넓어졌다”고 설명했다. 추정의 원칙은 의학적으로 명확한 인과관계가 없더라도 여러 사정을 종합해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에 따라 성격적 요인 등이 얽혀 있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 판단이 어려웠던 정신질환 등에 대한 산재 인정률이 대폭 올랐다. 자살자의 산재신청 인정률은 2016년 34.5%에서 2017년 57.1%, 2018년 9월까지 82.8%로 3년 새 50%포인트 높아졌다.
“법원 판결 따라 산재 인정범위 확대”
공단이 이 같은 원칙을 도입해 인정범위를 넓히는 것은 법원 판결을 따라가는 측면이 크다. A씨 사례처럼 공단에서 산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가 본인이나 유족이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내서 이기면 이후부터는 비슷한 사건을 산재로 인정하는 식이다.
법원에서는 파격적인 판결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지난 1월에는 “반장이라는 사람이 무슨 작업을 이따위로 해”라는 등의 질책을 듣고 10분 뒤 쓰러져 뇌출혈로 사망한 B씨가 산업재해자에 해당한다는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나왔다. 1심 재판부는 “사망과 업무 사이에 타당한 인과관계가 없다”고 봤지만 2심은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근로자가 직장 내에서 느끼는 정신적 고통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를 높이는 판결이라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산재를 지나치게 폭넓게 인정해 사업주 등 보험금 납입자의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사업장의 연간재해율이 같은 업종 평균재해율의 두 배 이상이면 사업주는 안전보건 진단을 받아야 한다. 또 안전보건 개선계획서도 내야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정신질환 등은 발병에 개인적 요인이 크고 직장 내 직원 간 갈등 등 사업주가 손쓸 수 없는 요인 때문인 경우도 많다”며 “산재 인정률이 올라가면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업장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조아란 기자 arc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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