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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자리 놓고 무한정쟁 벌인 與野…3·15 부정선거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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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49) 나라 만들기 세력의 교체




취약국가

근대 국민국가는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으로 세워지는 걸작 건축물과 같다. 1948년 8월 15일의 독립은 초라한 기공식에 불과했다. 어떤 건물이 세워질지, 언제 준공을 볼지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는 미래였다. 안정된 정부, 직업적 관료제, 자립적 국가경제, 자주국방, 잘 통합된 국민, 원만한 민주정치와 같은 국민국가의 당위는 건국 당시의 현실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 길을 이끌 지식인 사회도 없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채 길을 나섰다. 한국인의 나라 만들기는 과연 성공했는가. 건국 71년에 던지는 질문이다.

초창기의 이 나라는 더없이 취약한 국가였다. 흔히들 국가는 강했고 사회는 약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오해다. 밀면 허물어질 듯이 국가도 취약했다. 우선 정부 재정이 비(非)자립적이었다. 1961년까지도 재정의 30% 이상이 미국의 원조로 충당됐다. 미국은 원조를 지렛대로 한국 정부의 재정 편성과 운영에 개입했다. 정부가 더는 미국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원조의 재정 비중이 10% 이하로 내려간 1968년이 돼서였다. 독립 이후 20년 만의 성취였다.

직업적 관료제의 경과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까지 관료의 채용은 연고에 의한 전형 방식이었다. 정부는 재정 긴축을 위해 관료의 정원을 자주 감축했으며, 이에 그들의 지위는 보장되지 않았다. 월급은 너무 박해 부정을 하지 않고서는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힘들었다. 각 부처가 정원 외로 고용한 촉탁의 월급은 민간기업이 부담했다. 부정부패는 1950년대 관료사회의 정상 행태였다. 정부가 관료의 지위를 보장하고 부패하지 않고서도 생계를 꾸릴 만한 월급을 지급한 것은 1967년께의 일이다.


대통령제 vs 내각제

독립 이후 14년간 이 나라의 정치는 정부 형태를 제1의 쟁점으로 해 무한 정쟁을 벌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지지세력은 미국형 삼권분립과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했다. 한민당, 민국당, 민주당으로 이어진 야당은 내각책임제를 추구했다.

최초의 정부 형태는 두 세력의 어중간한 타협이었다. 대통령은 국회에 의해 간접 선출됐다. 타협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 4년간 야당은 내각제 개헌안을 두 차례 제출했다. 대통령 지지세력도 국민이 대통령을 직선하고 국회를 양원제로 바꾸는 개헌안을 두 차례 제출했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를 겁박해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을 관철했다. 이 사건이 ‘부산정치파동’이라 불린다.

이를 두고 흔히들 이승만의 권력욕이 빚은 파행이라 비판하지만 단견이다. 그것은 어중간한 타협이나 종다수(從多數, 다수 의견을 따름)의 선택이 허용되지 않는, 나라 만들기 수준의 정치였다. 이후에도 야당은 내각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1956년과 1960년의 선거에서 야당은 내각제 공약으로 여당을 공략했으며, 결국 성공했다.

4·19를 맞아 이승만 대통령은 내각제 개헌에 동의한다는 성명과 함께 하야했다. 이후 1년간 집권 민주당이 벌인 내각제 실험은 더없이 명백한 실패였다. 5·16 이후 대통령 중심제는 보다 순정한 형태로 복구됐다(1962년 제5차 개헌). 이후 대통령 직선제는 이 나라 민주정치를 상징하는 제도로 정착했다. 아무도 주의하지 않지만, 초창기의 그 무한 정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모순의 부통령제

1950년대 정치를 파행으로 이끈 다른 한편의 쟁점은 부통령제였다. 대통령 유고 시 차기 대통령이 선출되기까지 대통령직을 대행하라고 만든 것이 부통령제였다. 미국에서 생겨난 이 제도는 미국에서조차 정착하는 데 거의 100년이 걸렸다. 이 나라가 그 제도를 도입한 것은 정계의 원로를 대우해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취지였지만 큰 오산이었다. 사당의 위패처럼 조용히 앉아 있을 부통령은 아무도 없었다. 그 부통령제가 부산정치파동을 거치면서 국민 직선제로 바뀌었다. 대통령과 동반자로 선출됨이 마땅하나 정쟁에 몰입한 정치가들은 그렇게 조정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충분히 예상된 부작용은 1956년 선거에서 어김없이 현실화했다. 야당은 고령의 대통령이 언제 별세할지 모르는데 부통령 자리라도 차지해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선전했다. 다수의 국민이 그에 동조했다. 이후 4년의 정국은 파행의 연속이었다. 부통령제를 고치자는 개헌 논의가 일었으나 야당은 완강한 자세로 거부했다. 4·19는 위기에 몰린 자유당의 급진파가 부통령을 되찾기 위해 자행한 부정선거로 발생했다.


권위주의 정치

1950년부터 1960년까지 대통령과 부통령, 국회의원, 지방의원을 뽑는 전국적 선거가 무려 일곱 차례나 행해졌다. 건국 당시 국민의 절반은 문맹이었다. 문맹률은 1960년까지 10%로 줄지만 국민의 다수가 자기 책임으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없는 사회의 수준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사회는 시민사회가 아니라 소농사회였다. 그 모든 선거는 부정선거였다. 대부분의 선거는 유권자가 그를 동원하는 동리, 친족, 관권, 정당의 지시를 따르는 준봉(遵奉, 전례나 명령을 좇아서 받듦)선거였다. 선거 때마다 전국은 몇 개의 대립적 연고와 권위가 일으키는 거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권위주의 정치는 다수의 유권자가 특정 정치인을 가부장의 권위로 봉대하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성립한다. 민주정치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도 유효하다는 생각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다. 세계대전 후에 독립한 여러 후진국의 정치는 일반적으로 권위주의 정치였다. 성급한 민주정치는 오히려 재앙이었다. 권위주의 정치는 비판의 적이라기보다 나라 만들기 역사에서 그것이 수행한 역할과 공적에 따라 평가돼야 한다. 사회가 ‘준봉선거’의 행태를 보이고 정치 엘리트 사이에 조정이 불가능한 대립이 조성될 때 권위주의 정치는 불가피했다. 행여나 그 권위가 역사를 견인하는 혜안과 의지라면 그것은 보통의 후진국이 누릴 수 없는 특별한 축복이었다. 이 나라의 70년 역사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면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으로 이어진 권위주의 정치에 그 한편의 공로가 돌려져야 함은 다툼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연속 정변

권위주의 정치는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다수 국민에 발휘한 가부장적 권위는 195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현저히 쇠퇴했다. 공산세력의 침략을 저지하고,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쟁취하고,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제네바회담에서 독립을 방어하고, 북진통일의 구호로 국민을 결속하고, 일본과의 대립각을 세우고, 전후 부흥을 이끈 그의 권위주의 정치는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그 덕분에 성숙한 자유 시민에 의해 배척될 수밖에 없는 모순의 증폭 과정이었다.

그 권위주의 정치를 타도한 4·19를 가리켜 통상 ‘혁명’으로 칭하지만 과도한 언설이다. 4·19가 ‘자유민주’를 실현한 것처럼 이야기함은 참으로 큰 오해다. ‘자유민주’ 그것은 12년 전의 건국이 추구한 최고의 이념이었다. 냉정하게 따질 때 4·19가 초래한 변화는 정부 형태를 대통령 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교체한 것이 고작이었다. 민주당 집권기 10개월간 국무위원의 평균 재임은 2개월에 불과했다.

정치가 무한 정쟁을 거듭하는 가운데 사회는 크게 방종했다. 그 10개월간 전국 도처에서 도합 2000건의 데모가 일었다. 드디어는 지하에 잠복한 반국가세력이 고개를 들고 “김일성 만세”를 외치기까지 했다. “언론자유의 출발은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는 데 있는데”라고 노래한 시인도 있었다. 그들은 그 자유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 같은 위기의 세태는 이전의 권위주의 정치가 무슨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반면교사로 일깨웠다. 일단의 군인들이 5·16이란 또 하나의 정변을 일으켰을 때 사회는 심지어 정치까지도 올 것이 왔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때까지의 정치는 조선왕조 시대에 태어나 독립운동에 종사한 늙은 명망가들에 의해 좌우됐다. 그들이 4·19와 5·16이란 연속 정변으로 퇴진했다. 세계시장은 후진국이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공업화를 이룰 수 있는 희망의 구조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 참에 군대식 규율로 단결하고 실용적 행정으로 훈련된 젊은 정치세력이 나라 만들기 역사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그에 억압된 소수 정치인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에겐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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