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SK하이닉스·LGD 호소에도
귀 닫은 환경부
내년부터 모든 공장에 적용
[ 도병욱/고재연/김진수 기자 ]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등의 일부 공장이 1년 넘게 가동을 멈춰야 할 위기에 처했다. 대폭 강화된 유해화학물질 취급 관련 안전 기준(화학물질관리법 및 시행규칙)을 맞추지 못해서다. 정부가 애초부터 지키기 힘든 기준을 제시해 놓고, 수년간 이어진 규제 현실화 요구를 외면해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게 기업들의 하소연이다.
19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들이 올해 말로 유예기간이 끝나는 화학물질관리법 제24조 및 시행규칙을 완화해 달라고 2년 넘게 요청했지만 주무 부처인 환경부가 이를 거절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시행규칙의 핵심은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공장에 대해 ‘저압가스 배관검사’를 의무화한 것이다. 공장의 낡은 배관을 타고 유독 가스가 외부로 새 나오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문제는 배관검사가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24시간 돌아가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은 공정 특성상 배관검사를 받기 위해 일부 관련 공정만 멈추는 게 불가능하다. 전 생산라인을 세워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이 저압가스 배관검사를 받는 데는 약 14개월이 걸린다”며 “규모가 큰 일부 업체는 수조원의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사태가 커질 조짐을 보이자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업체와 환경부 관계자들이 지난 18일 긴급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지만 의견 조율에 실패했다. 환경부는 “산업계 애로사항을 검토해보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화학물질관리법(2015년 1월 1일 시행)은 유해화학물질의 취급·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옛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을 전면 개정해 탄생했다. 법안 발의 후 한 달 만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처음부터 졸속 입법 논란이 컸다. 이 법은 유해물질 취급 공장이 충족해야 할 안전 기준을 79개에서 413개로 늘렸다. 법 시행 전 설립된 공장도 5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이 기준을 맞추도록 했다.
"화관법 맞추려면, 공장 멈추고 배관검사만 14개월…수조원 피해 우려"
한국 수출의 25%를 책임지는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들이 떨고 있다. 2015년 1월부터 시행된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때문이다. 이 법의 일부 조항(제24조 5항 등)은 내년 1월부터 적용된다. 새 기준을 지키려면 가동 중인 공장들은 생산라인을 멈추고 검사를 받아야 한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은 올스톱된다는 의미다. 자칫하면 수조원대의 손실을 입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가스 배관 검사에 1년 날릴 판
화관법 24조의 주요 내용은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사업장에 안전진단 의무를 부과한 것이다. 화학물질을 쓰는 공장 내 시설을 더 엄격하게 관리해 안전사고를 막자는 취지다.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공장을 신설하려는 사업자는 사전에 검사를 받아야 한다. 내년부터는 이미 가동 중인 공장도 안전진단 대상이 된다. 화관법 관련 하위법령은 법 시행 전부터 가동 중인 공장에 대한 안전진단을 올해 말까지 유예했다.
유예기간 중 화학물질을 다루는 기업들은 정부에 끊임없이 호소했다. 가동 중인 공장까지 안전진단을 다시 받으라는 건 무리라는 이유에서다. 재계 관계자는 “공장을 설립할 당시 법과 시행규칙 등에 맞춰 각종 설비를 만들었는데, 수년이 지난 다음 새 기준을 다시 적용하라고 하면 기업들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일부 업체는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을 세워야 할 판”이라고 지적했다.
화관법이 시행되면서 각 공장이 지켜야 할 안전기준은 79개에서 413개로 늘었다. 저압가스가 지나가는 배관에 대한 안전검사 의무화도 새로 추가된 기준 중 하나다. 독성이 있는 저압가스를 취급하는 공장은 모든 배관을 검사받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고압 독성가스 배관만 안전검사를 했다. 압력이 낮은 가스관에서는 독성가스가 새나올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산업계에서는 취지는 좋지만 현실을 무시한 조항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배관 세척(1개월)→이중배관 해체(3개월)→비파괴검사(2개월)→배관 재세척(1개월)→이중배관 재설치(3개월)→내압시험(3개월)’ 등을 거치는 데 최소 13개월이 필요하다. 또 공장을 재가동한 뒤 공정 수율을 예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1개월이 추가로 필요하다. 총 14개월이 낭비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일부 사업장의 경우 공장을 계속 돌리면서 이 과정을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이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장이 대표적이다.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업체 관계자는 “배관이 하나의 라인으로 이어져 있어 배관 검사를 하려면 공장 전체를 멈춰야 한다”며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을 1년 넘게 가동 중단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은 “폐업 위기” 호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등이 공장을 1년 넘게 멈추면 그로 인한 손실은 수조원대 규모가 될 가능성이 높다. LG디스플레이의 국내 공장 10개 중 8개는 2015년 이전부터 가동됐다. 공장 80%를 1년 넘게 멈춰야 한다는 의미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각 공장은 이미 자체적으로 저압가스 배관에 대한 안전관리를 하고 있다”며 “환경부가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다시 검사를 받으라고 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한국 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공장이 가동을 멈추는 동안 후발주자인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올 가능성도 크다. 중국은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산업에 대한 집중투자를 이어오고 있다. 아직은 격차가 유지되고 있지만, 1년 넘게 공장을 멈췄다가는 순식간에 따라잡힐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공장은 대부분 자동시스템을 통해 배관 안전관리를 하고 있다. 배관검사를 하기 위해 인력을 투입했다가 안전사고가 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들 공장은 배관이 들어가 있는 공간이 좁기 때문에 배관을 잘못 건드리면 폭발사고가 날 가능성도 있다.
중소기업계도 절박함을 호소하고 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당장 유해화학물질 영업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작성하는 데도 물질 1개당 1000만원이 들고, 설비를 바꾸는 데는 최소 1억원이 필요하다”며 “이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업체들은 폐업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병욱/고재연/김진수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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