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4) 역사시대로의 이행 (하)
부뚜막은 불을 들이는 아궁이, 솥걸이와 솥받침을 놓는 연소부, 연기가 빠지는 연도(煙道·구들)로 구성됐다. 시설 재료는 초기에는 돌과 점토였는데 점차 판석재로 고급화했다. 그에 따라 부뚜막의 난방 기능이 강화됐다. 부뚜막이 설치됨에 따라 반지하 움집의 벽체도 고급화했다. 연도가 벽체에 시설되면 벽체는 내화성을 지녀야 한다. 이에 반지하 움집의 하부 벽체가 종래의 목재에서 점토를 덧칠한 더 견고한 형태로 바뀌어갔다. 벽체 높이도 높아져 반지하 움집이 점차 지상가옥으로 이행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연(烟)
전회에서 지적한 대로 청동기시대 인간들은 야외 노지에서 공동 취사를 했다. 공동 취사 단위는 대개 20명으로 소규모 가족 4개의 복합체였다. 곧 청동기시대에서 생활자료의 취득과 소비 단위로서 개별 세대(household)는 20명 안팎의 가족복합체였다. 철기시대에 이르러 부뚜막이 주거지 내에 설치됐음은 소규모 가족이 개별 세대로 성립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414년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왕비에서는 이렇게 성립한 소규모 가족의 세대를 가리켜 연(烟)이라 불렀다. 반지하 움집의 부뚜막에서 밥 짓는 연기가 지붕 위로 솟은 연도를 통해 피어오르는 모습에서 그런 백성 칭호가 고안됐다고 여겨진다. 551년 세워진 신라 단양적성비도 그의 백성을 가리켜 연이라 했다. 문명 역사시대의 상징으로 국가가 솟아오를 때 그 저변에는 소규모 가족이 공동 취사의 집단에서 분리돼 개별 취사의 세대로 자립하는 역사의 진보가 가로놓였다.
세대복합체
그렇지만 소규모 가족 세대로의 자립성은 아직 생산 과정에까지 미치진 못했다. 생산력 수준에 제약이 있어 생산 과정은 몇 개의 세대가 결속한 공동 노동으로 이뤄졌다. 정치 권력에 대한 각종 부세 부담에서도 그랬다. 소규모 가족이 생산 과정에서나 부세 부담에서까지 자립적 세대로 성립한 상태를 가리켜 필자는 소농(peasant)이라 부른다. 한국사에서 소농이 농가의 일반적 형태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후에도 1000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됐다. 2~5세기에 분출한 소규모 세대는 생산 과정에서 나아가 사회·정치·종교의 다양한 수준에서 세대복합체(household complex)로 결속했다.
미사리 유적의 백제시대 지층에서는 11기의 주거지와 더불어 9900㎡ 이상의 밭이 발굴됐다. 원래는 그보다 훨씬 더 넓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시된 자료 사진에서 보듯이 이랑과 고랑의 폭이 넓고 깊이가 얕다. 이랑과 고랑의 접면은 직선이고 수직이다. 이 같은 이랑과 고랑의 생김새는 거친 쟁기갈이의 소산이 아니다. 쟁기는 아직 보급되지 않은 단계였다. 이랑과 고랑은 여러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쇠호미로 흙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방식의 노동이라면 노동력이 2명에 불과한 소규모 가족이 9900㎡ 규모의 넓은 밭을 그 가족만의 힘으로 경작하긴 곤란했을 것이다. 밭은 11기의 주거지에서 공동 경작했음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주거지 유적에서는 벼루, 방제경, 쇠호미 등이 출토됐다. 방제경은 한경(漢鏡)을 모방한 거울을 말한다. 주거지 주인은 외부와의 교통을 책임진 유력자였다. 11개의 소규모 가족은 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대복합체로 결속했다.
이 같은 세대복합체의 존재는 미사리 유적에서뿐 아니라 각지 취락 유적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세대복합체는 공동 노동의 단위였을 뿐 아니라 고대 국가가 구축한 백성 지배체제의 기초 단위를 이뤘다.
4~6세기 한국인이 이 세대복합체를 가리켜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아직 문자생활이 일반화하지 않아서인지 전하지 않는다. 그것이 확인되는 것은 7세기 말 신라촌락문서인데, 공연(孔烟)이라 했다.
■기억해주세요
세대복합체는 공동 노동의 단위였을 뿐 아니라 고대 국가가 구축한 백성 지배체제의 기초 단위를 이뤘다. 4~6세기 한국인이 이 세대복합체를 가리켜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아직 문자생활이 일반화하지 않아서인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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