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기업 보유현금 170兆
군살 빼고 현금 쌓는 기업들
[ 송종현/김익환 기자 ] 매출 기준 상위 20대 기업의 보유 현금(현금 및 현금성자산+만기 1년 이내 단기금융상품 잔액)이 지난해 10조원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고 자산 매각을 늘리면서다. 경기 침체가 본격화할 것에 대비해 선제적으로 유동성 확보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8년 연결재무제표를 발표한 20대 기업의 지난해 말 기준 현금·현금성자산과 단기금융상품 잔액은 총 169조8167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말(157조7624억원)보다 12조543억원(7.6%) 불어났다. 정보기술(IT) 화학 업종 등의 호황으로 투자가 늘어났던 전년 증가율(0.5%)보다 크게 높아진 수치다. 현금·현금성자산과 단기금융상품 잔액은 신용평가회사들이 기업 분석 과정에서 ‘현금성자산’으로 분류하는 재무제표상 항목이다.
삼성전자 보유현금이 작년 말 96조2343억원에 달해 전체의 56.6%를 차지했다. 증가율은 이마트(44.4%) 삼성SDI(27.8%) LG전자(26.8%) SK텔레콤(23.0%) 삼성전자(20.3%) 순으로 높았다.
이들 기업 중 12곳이 지난해 투자를 줄였다. 지난해 국내 기업의 설비투자는 전년보다 4.2% 감소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9.6%) 후 최대폭이다. 기업들이 현금성자산을 크게 늘린 것은 ‘불황 한파’를 우려해 자금을 보수적으로 운용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김한진 KTB투자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 경기 둔화 가능성에 대비해 적잖은 기업이 사업 운영에 필요한 현금을 최대한 손에 쥐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도 '비상 경영'…장부가보다 싸게 공장 팔고, 비주력 사업 정리
지난해 20대 기업의 보유현금(현금 및 현금성자산+1년 이내 단기금융상품 잔액)이 불어난 것은 미·중 무역분쟁과 경기침체 등으로 경영 환경에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올 들어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 하강이 가속화되면서 비주력 자산 매각 등 기업들의 현금 확보 움직임은 더욱 빨라지고 있다.
불황 대비하는 대기업
20대 기업의 보유 현금은 지난해 7.6% 증가했다. 이 수치는 조선 해운 등 취약업종 구조조정으로 경영 불확실성이 확대된 2015년(증가율 15.9%), 2016년(19.0%)에도 크게 뛰었다.
20대 기업 중 지난해 보유현금 규모가 증가한 곳은 15개였다. 이마트가 가장 많이 늘었다. 작년 말 기준 보유현금은 4642억원이었다. 전년 말(3214억원)보다 44.4% 증가했다. 이어 삼성SDI(증가율 27.8%) LG전자(26.8%) SK텔레콤(23.0%) 삼성전자(20.3%) 순으로 증가폭이 컸다.
현금을 늘린 15개 기업 중 삼성전자 LG전자 삼성SDI를 제외한 12곳이 지난해 유·무형 자산 취득 등 투자 활동용 현금을 줄였다. 이마트의 지난해 유형자산 처분금액은 2022억원으로 전년(1296억원)보다 56.0% 증가했다. 반면 투자부동산 취득은 전년 2988억원에서 1478억원으로 50.5% 급감했다.
삼성전자도 전년보다 80.6% 늘어난 5569억원어치의 유형자산을 매각했다. 유형자산 취득은 42조7922억원에서 29조5564억원으로 30.9% 줄였다. SK텔레콤도 유형자산 처분이 2조9368억원에서 5조8256억원으로 98.3% 급증했다.
올해도 자산 처분
올 들어 대기업 계열사와 중견·중소기업의 자산 매각이 줄을 잇고 있다. SK인천석유화학은 최근 인천 석남동 부동산을 655억원에 매각했다. 인천 석남녹지도시숲 인근에 자리잡은 매각 대상 부동산의 지난해 말 기준 장부가치는 791억원이다. SK인천석유화학은 자산유동화 차원에서 장부가보다 낮은 가격(655억원)에 부동산을 팔면서 차액인 136억원만큼을 회계상 손실 처리할 예정이다.
LG디스플레이는 폴란드 법인이 보유한 701억원(장부가) 규모 부동산 매각을 상반기에 마무리하기로 했다. 중국과의 경쟁 격화로 지난해 1794억원의 순손실을 낸 이 회사는 최근 무배당을 결정했다.
코오롱머티리얼은 나일론·폴리에스테르 원사 사업부문 영업을 지난 4일 중단한 뒤 관련 자산을 곧 매각할 계획이다. 삼성SDI는 중국 계열사 지분을 처분한다. 한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는 “올 들어 보유자산을 유동화해 현금을 확보할 방안을 자문해달라는 기업 문의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옥 등 보유 부동산에 애정이 강한 60, 70대 오너들조차 요즘은 ‘1~2년 안에 큰 어려움이 닥칠 수 있으니 일단 현금부터 확보해 두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예상보다 빠른 경기 냉각
대기업의 ‘월동 준비’는 올해 글로벌 경기 둔화가 예상보다 가팔라지면서 더욱 분주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6일 한국, 미국, 중국 등 세계 주요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작년 11월 발표 때보다 0.1~0.2%포인트씩 하향조정한 데 이어 유럽중앙은행(ECB)은 8일 지난해 12월 제시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올 성장률 전망치(1.7%)를 1.1%로 떨어뜨렸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는 세계 주요 수출지역의 경기둔화가 국내 대기업에 타격을 주고, 그 영향으로 내수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외변수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흔들릴 경우 기업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경기부진에 대한 우려로 원화를 비롯한 신흥국 통화가치가 약세로 돌아설 조짐을 보이는 것도 기업에 부담 요인이다. 통화가치 약세는 금융시장 불안을 야기해 기업들의 조달 비용을 늘리는 요인이 된다.
골드만삭스가 1997년 초를 100으로 놓고 신흥국 19개국 통화가치 대비 달러가치를 비교해 발표하는 지수는 2017년 말 153.11에서 작년 말 167.60으로 상승했다. 2월 들어선 166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우중 NH선물 연구원은 “ECB뿐 아니라 미국 중앙은행(Fed) 역시 경기 둔화 우려를 나타내면서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강해졌다”며 “미·북 관계가 악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지정학적 리스크(위험)가 커진 것도 원·달러 환율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송종현/김익환 기자 screa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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