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41) 전시경제의 조선
日, 중국 이어 동남아 침략…엔 블록 구축하고 석유 확보 욕망
美가 해상 봉쇄하자 진주만 공습…쌀·소금 등 소비재 조선서 대량조달
엔 블록
1929년 10월 미국의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대공황은 세계로 번져갔다. 세계를 통합한 통화와 금융 체제가 무너졌다. 세계 경제는 영국, 미국, 독일, 일본을 축으로 하는 통화 블록으로 분열했다. 일본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걸친 엔(円) 블록을 구축했다. 일본제국의 판도가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해 만주국이란 괴뢰국가를 세웠다. 1932년에는 중국 상하이를 점령했다. 1937년에는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로써 1945년까지 이어진 중일전쟁이 개시됐다.
1939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뒤이어 일본은 남방 진출을 감행했다. 석유에 대한 욕망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엔 블록은 몇 개의 동심환(同心環)으로 이뤄졌다. 일본이 중심으로서 제1환이라면, 조선·대만·사할린은 제2환을, 중국 관내의 점령지는 제3환을, 남방 점령지는 제4환을 이뤘다. 1939년 수립된 블록 차원의 계획에서 조선을 포함한 제2환은 중심 일본에 철광석, 알루미늄, 아연, 중유, 인견, 펄프, 금 등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조선 경제는 큰 변화를 경험했다.
제국의 파탄
일본의 남방 진출은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초래해 제국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미국은 일본의 동남아 점령에 맞서 일본과의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석유를 포함한 산업 물자의 대일 수출을 금지했다. 나아가 일본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미국과 필사의 협상을 벌였으나 미 군부의 강경 노선에 부딪혀 실패했다.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의 미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해상수송이 마비되자 엔 블록에서 조선의 역할이 점점 커졌다. 1943년 조선은 블록 전체에서 선철의 8%, 철광석의 16%, 석탄의 6%, 알루미늄의 8%를 공급했다. 1944년이면 해상의 안전 항해가 조선과 일본의 바다로 축소됐다. 이후 조선은 쌀·면포·소금 등 소비재까지 일본에 공급했는데, 그로 인해 조선의 생활수준이 크게 악화했다. 제국의 파탄 과정은 조선이 해방되는 행운의 과정이었다.
군사공업의 건설
엔 블록의 정책에 따라 군사공업이 조선에 건설됐다. 최초의 군사공업은 1937년 부산 영도에 설립된 조선중공업이었다. 이 회사는 1000t급 이상의 강선(鋼船)을 건조할 수 있는 최초의 조선소였다. 대부분의 군사공업은 광물자원이 풍부한 조선 북부에 건설됐다. 일제가 패망할 당시 조선 북부에 있던 일본 광산회사와 제조업 공장은 자본금 50만원 이상의 대형 업체만 해도 170개에 달했다. 1911∼1936년 설립된 것이 58개, 1937∼1945년 설립된 것이 95개였다(나머지는 불명).
1937년 이후 조선 북부로 진출한 일본의 공장은 선철·강괴·알루미늄·마그네슘 등의 금속공업이 주류였다. 1941년 이후 일본의 공업이 조선 북부로 이동한 데에는 미 공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한 소개(疏開)의 목적도 있었다. 병기를 제작하는 공장도 여러 개였다. 1942년에 설립된 조선비행기제작소는 50대의 비행기를 제작할 설비 능력을 갖췄는데, 종전까지 18대를 제작했다. 평양의 조선병기제조소는 소총·박격포 등 개인화기와 월 19만 발의 탄환을 생산했다. 종업원 규모는 6000명을 넘었다. 1937년 이후 조선 북부는 세계 유수의 중화학공업지대로 변모했다. 종전 당시의 1인당 철도 길이와 발전량은 일본을 능가했다. 일제는 이후 그 지역을 통치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더없이 풍족한 유산을 남겼다.
식량의 공출
전시기의 농업은 비료와 자재 부족으로 후퇴했다. 미곡 생산은 1941년 2500만 석에서 1944년 1600만 석으로 감소했다. 그럼에도 총독부는 군량 확보를 위해 미곡의 집하, 유통, 소비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939년 총독부는 미곡의 자유시장을 폐지했으며, 1940년부터는 미곡의 배급제를 실시했다. 이를 위해 미곡을 법정가격으로 강제 매수하는 공출제를 시행했다. 농가는 자가 식량을 제외한 모든 미곡을 공출해야 했다. 1943년부터는 맥류도 공출의 대상이 됐다. 미곡 총생산에서 공출의 비중은 1941년 43%에서 1944년 64%로 증가했다. 그에 따라 농가의 식량 사정이 크게 악화했다.
총독부의 전시통제는 지주제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총독부는 식량 증산과 농민 동원을 위해 지주제를 억압했다. 지주의 소작료 수취에 앞서 소작농으로부터 먼저 공출했다. 지주의 소작료 인상도 불허했다. 소작농에겐 생산장려금을 지급했는데, 지주에겐 지급하지 않았다. 이 같은 환경 변화에 따라 지주들이 토지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여러 지역에서 1942년 이후 0.5㏊ 미만 하층 농가의 소유지가 부쩍 증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은 사회개혁을 몰고 오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민이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구이동
조선인의 역외 유출, 곧 만주나 일본으로의 이동은 1910년대부터 시작됐다. 일본으로의 순유출은 1945년까지 도합 184만 명이었다. 1910년대는 연평균 5000명, 1920년대는 연평균 3만5000명, 1930년대는 연평균 7만2000명이었다. 일본의 임금 수준은 조선보다 3배가량 높았다. 그것이 인구이동을 유발한 기본 요인이었다. 초기의 이동은 주로 단신 이주로 단기취업이 목적이었다. 1933년 이후에는 가족과 함께 일본에 정착하는 조선인이 일본 거주 조선인의 다수를 차지했다. 그들은 주로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 광공업 도시의 하층민으로 정착했다.
일본의 조선인 사회는 조금씩 사회경제적 지위를 개선해 갔다. 1925년 일본에서 보통선거제가 시행되자 조선인도 참정권을 인정받았다. 1933년부터는 조선인이 밀집한 지역에서 지방의회 선거에 입후보하는 조선인들이 나타났다. 1945년까지 후쿠오카현에서 지방의원으로 입후보한 조선인의 연인원은 33명이며 그 가운데 17명이 당선됐다.
일본으로의 이동은 1939년부터 연간 10만 명 이상으로 갑자기 증가했다. 1941년이 그 정점인데 20만8000명에 달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저임금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먼저 정착한 이민자가 친족을 초청하는 연쇄 이민이 이주의 주요 경로였다. 이 같은 자발적 이주가 1939년부터 시작된 노무 동원보다 많았다. 1939∼1942년의 자발적 이주는 67만 명이었다. 이에 비해 각급 동원은 30만 명이 조금 못됐다. 자발적 이주는 1942년 이후 크게 줄었다. 미 공군의 일본 공습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1945년까지 연간 10만 명 이상이 일본으로 자발적으로 이주했다.
노무 동원
일본으로 노무 동원이 시작된 것은 1939년부터다. 그해 총독부는 일본 기업의 요구에 부응해 그들이 조선에서 노무자를 모집하는 데 행정 편의를 제공했다. 이후 1941년까지 17만 명 정도가 일본으로 모집됐다. 1942년부터 총독부는 일정 지역에서 일정 수의 노무자를 동원해 일본 기업과 고용 관계를 맺어주는 관(官)알선을 개시했다. 기존의 모집은 동원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모집에 응한 조선인 상당수가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다 고임금의 다른 작업장으로 도망했다. 이에 관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생겨 알선 정책으로 전환했다. 1944년 7월까지 알선에 의한 동원은 25만 명이었다.
1944년 9월부터는 국민징용령에 의한 징용이 동원의 주요 수단이 됐다. 징용은 이전의 모집이나 관알선과 달리 조선인의 의사에 반해 강압적으로 이뤄졌다. 오늘날 한국인의 동원에 대한 쓰라린 기억은 대개 1944년 9월 이후의 징용에서 형성된 것이다. 징용 규모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944년 9월부터니까 그해의 총 30만 명 가운데 절반을 징용으로 볼 수 있다. 1945년부터는 미 잠수함 활동으로 일본으로의 도항에 큰 제약이 걸렸다. 1945년의 동원이 1만 명에 불과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상 1939∼1945년 모집, 관알선, 징용에 의한 조선인의 역외동원은 73만4000여 명에 달했다. 그들이 일본의 공장과 광산에서 노예로 혹사당했다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언제부턴가 환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노예 사역의 수익성이 노무 계약의 그것보다 클 수 없음은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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