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산·호수가 어우러진 인디오의 촌락
토속적 멋과 자연의 아름다움 품어
1주일에 한번 열리는 장날의 풍경
골동품과 먹거리 펼쳐진 모습 인상적
열대 밀림 지대 솟아오른 피라미드
과거로 통한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듯
중앙아메리카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돌아보는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멕시코와 과테말라라 할 수 있다. 멕시코는 과거 대제국을 이뤘던 아스테카를 비롯해 테오티우아칸, 툴라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마야 등 고대문명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있어 여행자들이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과테말라는 멕시코만큼 다양한 볼거리는 없지만 열대 밀림 속의 마야 문명뿐 아니라 순수한 토착민인 인디오의 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를 주기 때문에 또 다른 매력을 지닌 곳이다. 멕시코가 과거 스페인 정복자들의 피가 섞인 ‘메스티소의 나라’라면 과테말라는 ‘인디오의 나라’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인디오가 많다. 그만큼 토속적인 멋이 살아 있는 곳이 과테말라다. 인디오들은 머리 색과 체형이 한국인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더 호감을 갖게 한다. 멕시코를 거쳐 과테말라를 찾으면 그동안 멕시코에서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마야 후예들이 오가는 한 폭의 절묘한 풍경화
인디오의 나라 과테말라. 마야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는 동부의 유카탄 지역을 제외하면 국토의 태반이 해발 1000~2500m 정도의 고원으로 숱한 화산이 이따금 연기를 내뿜는 화산지대다. 과거 스페인 정복자들의 가혹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일대에 가장 많은 인디오가 생존해 있다는 것은 이렇듯 준엄한 산맥 덕택에 그들의 눈에서 용케도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인구 대부분이 이런 산악 고원지대에서 살기 때문에 위도상으로는 열대에 속하면서도 연중 우리의 봄가을 기온을 유지해 쾌적하다.
인디오의 촌락이 아름다운 산과 호수 주변에 산재하고 짙푸른 자연 속에 원색도 선명한 민속 의상으로 감싼 마야 후예들이 오가는 도시와 마을은 한 폭의 절묘한 풍경화이다. 그러니까 잘 정돈된 멕시코에 비해 아직 속화(俗化)되지 않은 자연미가 살아 있어 더 큰 매력을 느끼게 한다.
과테말라의 수도인 과테말라시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안티과라는 소도시가 있다. 도시라기보다는 차라리 아담한 마을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은 이곳을 ‘아구아(물)’와 ‘프에고(불)’라는 이름이 붙은 두 개의 원추형 화산이 희미한 안개 속에서 고고하게 굽어보고 있다. 몽환의 세계를 보는 듯한 분위기다. 사실 안티과의 역사를 가장 잘 아는 증인이 이 두 화산이다.
스페인의 정복자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세운 도읍을 화산 아구아가 1542년 대폭발을 일으켜 매몰시켰다. 그러자 다시 옆에 인디오들을 노예처럼 부려 새로운 도읍을 건설한 것이 오늘날의 안티과다. 그로부터 200년 뒤 이번에는 대지진이 일어나 안티과 역시 폐허가 되고 말았으며 오늘날까지 그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이곳을 ‘아메리카의 폼페이’라고 부른다. 지금에 와서 인디오들이 부서진 가옥을 일부 수축해 살기 시작하지만 도로나 집은 옛 스페인풍 그대로며 군데군데 파괴된 교회나 학교가 그대로 앙증스레 서 있어 그야말로 ‘살아 있는 박물관’인 셈이다. 인디오들의 피와 땀 그리고 한이 서린 안티과. 오늘도 인디오들은 그 초라한 모습으로 그 골목길을 거닐면서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있다.
장기 체류하는 미국인 많은 그링고테낭고
인디오들의 촌락을 찾아가는 길은 어디를 가나 구불구불 험한 비포장 산길이었다. 수많은 인디오로 항상 만원인 낡은 버스는 보기와 달리 지붕 위에 별도의 짐보따리를 가득 싣고도 가파른 고갯길을 잘 달린다. 그 남루한 차림의 인디오들 틈바구니에 옹색하게 끼어 앉아 몇 시간씩 시달려도 전혀 싫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긴 여정에 물들다 보니 남루하기는 마찬가지고 생김새까지 비슷해 옆자리의 인디오조차 이방인 취급을 하지 않는 듯하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는 도중에 집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것은 온통 잡목이 우거진 산악이고, 그 옹색한 비탈을 잘도 개간해놓은 밭도랑에서 옥수수가 자라 수확기를 맞고 있다. 보이는 밭도랑마다 옥수수뿐이다. 이들의 주식이 옥수수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옥수숫가루로 반죽해 둥글넓적하게 구워내는 것을 ‘토르티야’라고 하는데, 여기에 각종 수프를 곁들어 먹기도 하고 감자나 치즈를 넣는 등 여러 형태로 즐긴다. 그래서 인디오가 있는 곳에는 항상 토르티야가 있다. 그 맛은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랄 때 먹었던 ‘개떡’ 바로 그것이었다.
해발 1500m쯤에 아티틀란이라는 이름의 호수가 하나 있다. 마치 바다처럼 넓고 맑다. 또 주변에 3개의 3000m급 원추형 화산이 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어 더욱 신비스럽다. 그래서 과테말라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이곳에 들르는데 그 중심이 되는 마을이 파나하첼이라는 곳이다.
파나하첼은 아티틀란의 꿈같은 분위기를 즐기기에도 좋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민예품 가게를 둘러보면서 인디오의 토속적인 멋을 찾아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과테말라 특유의 훌륭한 색채 감각으로 신화적 세계와 인디오의 풍속 등을 묘사하는 민예품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아쉽기만 하다. 또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에 있는 여러 크고 작은 마을과 장터를 찾아보면서 아직도 옛날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인디오의 삶을 체험해볼 수 있어 좋은 곳이다. 이런 다양한 분위기에 반해서인지 싼 숙소에 머무르면서 느긋하게 장기 체류하는 미국인이 많아 ‘그링고테낭고(양키마을)’라는 별명이 붙었다.
마야 후예들의 전원생활 모습은 이 고장의 환상적인 공허함을 한결 더 짙게 풍긴다. 이들 농가는 비록 가난해 보이기는 해도 평화롭고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주위에는 역시 옥수수밭과 잘 정돈된 망고·바나나밭이 있고, 골목길에는 닭·개가 득실거린다. 이따금 칠면조가 이 틈바구니에서 끽끽거리며 농가의 고요를 깨뜨린다. 여기서 한 가지 얘기하자면, 오늘날 서양인이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 등 명절에 즐겨 먹는 칠면조는 이곳에서 건너간 것이다. 그래서 한때 유럽에서는 이 칠면조를 ‘인디오의 새’로 불렀다고 한다. 또 토마토, 초콜릿, 담배 등이 모두 이곳 인디오 세계에서 퍼져나갔으며, 부드럽게 빠는 것을 마야어로 ‘쑤쓰’라고 하는데 이것이 ‘키스’의 어원이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화려한 전통의상 입고 노천 벌리는 장날 풍경
과테말라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인디오들의 장날 풍경이다. 마을마다 도시마다 대개 1주일에 한 번 열리는 이 장날에는 화려한 민속의상을 입은 인디오로 북새통을 이뤄 마치 인디오들의 축제를 보는 것 같다. 그 많은 장 중에서도 특히 해발 2000m 이상에서 열리는 ‘치치카스테낭고’의 일요일 장과 ‘샌프란시스코 엘 알토’의 금요일 장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 두 곳의 장날에는 각종 일용품, 과일, 민예품을 비롯해 골동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을 노천에 벌려놓은 상태에서 매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그 자체가 대단한 볼거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진정 이방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비좁은 틈새를 비집고 다니거나 노천식당에서 토르티야를 먹는 인디오들이다. 마야의 후예인 이들이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남자들은 이제 중절모자를 쓰고 있는 것 외엔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인다. 그에 비해 머리를 두 갈래로 길게 따 늘어뜨리고 화려한 색상의 전통의상을 갖춘 여인네들의 외모가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곳 여성들이 입고 있는 상의를 ‘우이필’이라고 하는데, 색상이나 무늬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한결같이 화려하다.
특히 치치카스테낭고의 우이필은 손으로 수를 놓은 기하학적 무늬의 화려함과 예술성이 곧 현대미술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 사람들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어느 누군가가 장미 무늬를 넣어 우이필을 만들자 그것이 대유행하고 이제 원조는 노인에게서나 볼 수 있게 되고 말았다.
치치카스테낭고의 장터에서는 꼭 빼놓지 않고 봐야 할 곳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장터 한가운데 자리한 하얀 교회 ‘산토 토마스 사원’ 앞 풍경이다. 이 교회는 1690년 마야 성전인 ‘포폴부(Popol Vuh)’의 원전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지만 장날에는 이 앞에서 향을 피우고 솔잎이나 치자나무, 장미꽃을 흩어놔 이교적인 세계가 창출된다.
장이 서기 시작하는 새벽부터 수많은 인디오가 이 교회 앞에 몰려들어 향을 피우고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기도한다. 교회 안에 들어가봐도 어두컴컴한 가운데 십자가만 썰렁하게 서 있을 뿐 예수상이나 마리아상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의자 하나도 안 보인다. 다만 인디오들이 군데군데 피워놓은 촛불만이 맨바닥에서 타올라 어느 서낭당 같다고나 할까.
천고의 밀림 속에 솟아오른 피라미드 환상적
과테말라의 인디오는 과거 정복자들의 강요에 못 이겨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차츰 세월이 흐르면서 ‘기독교라도 우리 자신의 그리스도를 숭상하자’는 몸부림으로 기독교에 토착 종교를 융합해 변형적 신앙을 만들어냈다. 이로 인해 지배계급이나 다름없는 기독교 교단이 가혹하게 탄압했으나 옛 마야 시대에서부터 내려온 깊은 뿌리를 자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알고 그 뿌리를 지키려는 굳은 의지인 것이다. 비록 가난이 줄줄 흐르는 그들이지만 선진 문물이면 무조건 비판 없이 받아들이려는 일부 계층 현대인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과테말라에서 마야 문명의 실체를 보려면 동쪽의 열대 밀림 지대인 ‘티칼’이라는 곳으로 가야 한다. 이곳은 유카탄반도 중앙에 자리한 마야 고전기 문명 최대의 도시 유적이다. 그러니까 기원전부터 시작해 당시 모든 마야 문화권이 그랬듯이 인구 만 명이 넘는 도시국가를 이루다가 10세기께 원인 모르게 방기돼 밀림 속에 매몰되고 말았던 것이다. 티칼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산길과는 다르다. 장거리 버스로 장장 14시간 동안 밀림 속을 지나야 했다. 물론 쉽게 가는 방법으로 항공편이 있긴 하지만 아득한 옛날의 시간을 더듬어보려면 힘들기는 해도 버스가 좋다. 장시간의 어두컴컴한 밀림 속 이동이 마치 과거로 통한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천고(千古)의 밀림 속에 솟아오른 거대한 피라미드군. 유적지 중앙 광장에는 ‘대자연과 신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1호 신전과 그 맞은편의 2호 신전이 우뚝 솟아 천년의 세월을 지켜보고 있다. 또 한참을 지나면 흙 속에 묻혀 얼굴만 내밀고 있는 3호 신전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피라미드가 밀림 속에 잠들어 있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고고학자들은 이곳 티칼의 피라미드가 멕시코를 포함한 마야 문명권 전 지역에서 가장 빼어난 건조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과테말라=글·사진 박하선 여행작가 hotsunny7@hanmail.net
여행정보
한국에서 바로 가는 항공편은 없고 미국의 주요 도시를 거쳐 갈 수 있다. 멕시코에서 육로로 들어갈 수 있는 몇 개의 루트가 있다.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에서 우에우에테낭고로 넘어갈 수도 있고, 치첸이트사에서 벨리즈를 거쳐 티칼의 프로레스로 들어갈 수도 있다. 최근 치안이 좋지 않다고 하니 외국 여행자 티를 내지 않는 게 좋다. 특히 혼자 길거리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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