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12) 1991년 단계적 금리자유화
1980년대 '3低 호황'의 그늘
정부 은행통제, 편법대출 내몰아…꺾기·사채 자금조성비 매년 폭증
정태수 前 한보그룹 회장
"1조 대출 땐 7000억은 어음 단자회사서 수수료 떼고 현금화"
노태우 정부의 '오판'
인위적인 低금리 한계 인식…CP금리부터 순차적으로 자유화
무제한 찍어내며 1996년 65兆로
'부실 감추는 마술'에 빠져
고금리에 취한 투자자 현실 외면…필리핀 등 해외까지 불안해지자
1997년부터 부실 한꺼번에 터져…한보·삼미·진로그룹 잇따라 부도
[ 이태호 기자 ]
“1조원을 5년간 빌리면 이른바 ‘자금조성비’로 6000억원이 빠져나갔습니다.”
1999년 2월4일 국회 한보사건 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그는 ‘자물통 입’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1997년 외환위기 이전 기업금융 시장의 놀라운 실상을 폭로한다. 1990년대 중후반 30대 대기업그룹의 3분의 1이 쓰러진 배후에는 천문학적인 ‘유령’ 금융비용이 존재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1991년 ‘금리 자유화’를 전후로 빠르게 성장한 중견그룹들이 편법적인 단기금융에 의존해야 했다고 털어놨다. 정부의 오랜 은행 통제와 소수 대기업그룹의 금융 독점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청문회 막바지엔 “거짓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형에 처해도 괜찮다”고 단언했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 자본시장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림자금융 키운 ‘공(公)금리’
“은행에서 1조원을 대출하면 돈을 다 안 줍니다. 7000억원은 지급보증(어음)으로 내줍니다.”
횡령과 뇌물공여로 수감 중이던 정 전 회장은 은행들의 ‘꺾기’ 관행으로 입을 뗐다. ‘지출증빙’을 찾을 수 없는 1조원의 행방을 추궁당하자 나온 답변이었다.
꺾기는 금리 자유화 이전 은행들이 수익 증대를 위해 썼던 변칙 영업이었다. ‘공금리’와 실세금리 두 개의 금리가 존재하던 당시 현금을 대출금보다 적게 내줘 실질 이자수익을 늘리려 했다. 정부가 실세금리보다 훨씬 낮은 공금리로 예금과 대출을 규제해 생긴 부작용이었다. 당시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의장은 재무부 장관이었다.
정부의 인위적인 저금리 정책은 전략산업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만성적인 대출수요 과잉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굴지의 대기업그룹을 제외한 많은 기업이 은행에 접근하지 못하고 제2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사채 시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정 전 회장에 따르면 한보는 은행의 지급보증어음을 들고 다시 단자회사(투자금융회사)를 찾아갔다. 단자회사는 종합금융회사(종금사)와 함께 어음을 가져오면 일부 수수료를 떼고 현금으로 바꿔주는 할인 업무를 했다. 자금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단자회사들은 어음 강매 등 은행보다 가혹한 꺾기를 하거나 사채 시장의 자금 모집책인 ‘전문인’을 연결해줬다. 전문인은 한보에 1억원당 분기에 300만원, 연 이자로 따지면 12%의 자금조성비를 요구했다. 이 자금조성 서비스엔 거래 증거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기업은 매년 늘어나는 금융비용을 분식 회계를 통해 채워넣어야 했다.
부분적 금리 자유화
“금리를 자유화하지 않고선 통화 관리가 거의 불가능합니다.”(1988년 7월 사공일 재무부 장관)
두 개의 금리로 인한 기업금융시장의 부조리는 1990년 전후 극에 달했다. 1980년대 중반 낮은 금리·유가·원화가치 등 ‘3저(低) 호황’은 기업의 덩치와 산업 복잡성을 키웠다. 우량 중소기업 사장들이 “금융자원 배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는 일이 잇따랐다. 금리의 가격결정 기능 부재로 현금이 생산적인 분야로 흘러가지 못했다.
세무공무원 출신인 정 전 회장은 유동성 위기 때마다 정치권 로비를 통해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1991년 터져나온 노태우 정부 최악의 정경유착 비리인 ‘수서 사건(한보그룹 택지 특혜분양)’은 이 같은 고리를 만천하에 드러낸 계기였다.
1987년 6월 항쟁은 정치에 이은 경제 민주화 요구를 고양했다. 당시 ‘우루과이라운드(UR)’로 대변되는 세계화 흐름도 정부를 압박했다. 1980년대 말 한국은행의 중립성을 보장하라는 ‘한국은행법 개정 100만인 서명운동’ 전개는 정부의 인위적인 통화정책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시사했다.
미국 UCLA에서 수학한 사공일 재무부 장관은 문제를 인식하고 1988년 12월 대출금리의 즉시 자유화를 시행한다. 하지만 정부가 1년 만에 창구지도에 나서면서 통화정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급작스러운 경기 위축과 물가상승 때문이었다. 사공 장관은 이듬해 교체된다.
시기를 더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노태우 정부는 1991년 공금리와 실세금리 격차가 줄어든 시점을 기회로 다시 금리 자유화에 나섰다. 1996년까지 순차적으로 금리를 완전 자유화한다는 구상이었다. 자유화 첫 타자는 단자회사의 기업어음(CP)이었다. 만기가 짧고 거액인 상품부터 부분적으로 자유화하는 게 금융시장의 충격을 줄일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런 비대칭적 자유화 결정은 나중에 엄청난 오판으로 비판받았다.
부실기업의 ‘독사과‘
CP 금리의 자유화는 곧바로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공금리보다 높은 이자를 돌려주는 CP는 낮은 예금금리에 불만을 품은 시중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은행의 신탁계정(투자자가 운용을 맡긴 돈)과 기업들도 왕성한 식욕을 나타냈다.
경수투자금융, 반도투자금융, 동해투자금융 등 CP를 취급하는 20여 곳의 단자회사는 관련 상품을 경쟁적으로 판매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영업 대상도 점차 위험 대기업군으로 확대했다. 1990년 13조원 수준이던 CP 잔액은 1996년 65조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부실 대기업그룹은 새로운 자금 조달 시장의 성장을 반겼다. 은행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기업들은 설움을 토해내듯 CP를 찍어댔다. CP는 발행 신고 의무가 없어 정부의 감시에서도 자유로웠다. 수요만 있으면 무제한 발행도 가능했다. 빚에 허덕이는 20~30대 그룹사의 ‘맞춤형’ 서비스였다.
CP 시장의 매력은 추가적인 금리자유화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군사정부와 차별화한 경제정책으로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그해 곧바로 모든 여신금리를 자유화했다. 은행들은 설립 후 처음으로 서로 다른 여수신 금리를 제시하며 경쟁 체제로 들어갔다. ‘공금리’란 표현도 1993년 3월 인하(일반대출 기준 기존 연 9~11%→8.5~10%)를 끝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정부는 계속 창구지도를 통해 은행 금리를 규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은행권을 통한 저리의 장기자금 공급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다. 반대로 단자회사들은 신경제 조치에 따라 무더기로 종합금융회사 인가를 얻어 업무 영역을 확대했다.
사채시장과 연계한 CP 시장의 성장은 부도 직전 기업까지 살려냈다. 정 전 회장이 언급한 자금조성비는 단자회사와 사채시장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CP 시장은 재계 전반에서 급속도로 불어나는 부실을 감추는 마술을 부렸다. 고금리에 취한 투자자는 현실을 외면했고,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금융감독 당국은 관련 규제를 계속 완화했다.
억눌린 부실의 폭발
1995년 1월. 멕시코 경제위기가 미주와 유럽을 지나 필리핀 외환시장까지 마비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글로벌 경제 불안의 불똥을 염려하던 그해 2월 단기금융시장 사상 최대의 금융사고가 터졌다. 8000억원의 빚에 시달리던 덕산그룹의 최종 부도 소식이었다.
부실기업의 ‘현금 창구’ 역할을 하던 CP 시장에선 나쁜 소문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일부 단자회사는 부도설이 도는 기업의 CP 만기를 점점 짧게 끊어주며 대응했다. 부실기업의 호흡은 갈수록 가빠졌고, 어느 순간 단자사들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CP 회수에 나서기 시작했다.
억눌렸던 부실은 1997년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가장 먼저 재계 10위(1996년 대차대조표 공정자산 기준) 한보그룹이 5조7000억원의 부채를 안고 1월 최종 부도 처리됐다. 당시 단기차입금 비중은 40%에 육박했다. 그해 4월에는 삼미그룹(자산총액 26위·부도)과 진로그룹(19위·부도유예협약)이 쓰러졌다. 5월 대농그룹(44위·부도유예협약), 7월 기아그룹(8위·부도유예협약)이 무너졌다. 11월에는 해태그룹(24위)과 뉴코아그룹(27위)이 화의를 신청했다.
기업금융시장은 완전히 멈춰섰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이 한국 경제 전체를 덮쳤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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