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 논설위원
[ 백광엽 기자 ]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 워싱턴DC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의 새 권력자로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서였다.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뜻밖에 ‘케미’가 맞았고, 미국은 지원을 약속했다.
방문단은 분위기 호전을 틈타 급하게 준비해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미국 국무부 관료들 앞에 들이밀며 차관을 요청했다. 혹평이 돌아왔다. 정교한 개발계획이 아니라 ‘어떤 공장을 짓겠다’는 리스트에 불과하다며 “실패할 게 뻔하다”는 면박까지 들어야 했다.
귀국한 박 의장은 낙담 대신 속전속결로 ‘공업입국’ 구상을 밀어붙였다. ‘한국 최초 공업도시’로 울산이 낙점되고 이듬해 2월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두 달에 한 번씩 울산을 정기시찰하는 등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울산은 혁명정부의 경제개발 의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였다”는 게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회고다.
그렇게 출발한 ‘2차산업 육성’은 ‘태화강의 기적’을 낳았고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울산은 한국 수출의 10%가량을 혼자 책임지며 ‘제조업의 심장’이자 ‘산업수도’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자동차, 석유화학·정유, 조선 등 3개 핵심 산업의 본거지인 울산은 자연스럽게 ‘전국 최고 부자도시’로 부상했다. 광역시로 승격된 이듬해인 1998년부터 1인당 지역내총생산 전국 1위를 지켜왔다. 주력 3대 산업 포트폴리오가 보완작용을 일으키며 안정 성장을 이어간 덕분이다.
그런 울산이 위기를 맞았다. 미·중 무역전쟁 등 국내외 악재에 흔들리며 어느새 ‘몰락 도시의 대표주자’로 회자되고 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울산의 지난해 개인소득증가율은 0.0%로 16개 시·도 중 꼴찌다. 지역 총소득 증가율은 -0.7%로 돌아섰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뒷걸음질했다. 전국 최고를 자랑하던 개인소득(가처분 소득 기준)도 2016년부터 서울에 이어 2위로 밀려났다. 인구 역시 2015년 11월 이후 4년째 감소세다.
울산은 반전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의 빠른 이행에 발맞춰 ‘제조업 일변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래형 글로벌 산업수도’로 거듭나기 위한 ‘울산비전 2040’이라는 야심찬 구상도 내놓았다. 남다른 성공 DNA를 재가동해 ‘울산의 눈물’이 ‘울산의 환희’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들리기를 응원한다.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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