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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권의 호모글로벌리스 (10)] 대화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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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권 < 글로벌리스트·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


필자가 해양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했던 때의 일이다. 휴식시간에 영국 대표와 토론을 하게 됐다. 그런데 필자가 그에게 다가설 때마다 그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반드시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다른 영국인 친구의 설명을 듣고 나서였다. 영국인은 상대방과 대화할 때 팔 하나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안정감을 느낀다. 즉 ‘어깨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독일, 북유럽 국가, 미국, 일본이 이 문화권에 속한다. 이곳 사람들은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때문에 다소 멀찍한 거리를 개인적인 영역으로 확보하고 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일본인은 의례나 형식을 중요시해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대화한다.

‘팔꿈치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대화 시 팔의 절반 정도 되는 거리를 유지해야 안정감을 느낀다. 한국, 중남미, 중동이 이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라틴계 사람들은 상대방의 숨결을 자신의 얼굴에서 느낄 정도로 아주 가까이 다가서서 대화한다. 이런 문화권에서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상대를 피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다가와도 처음의 자리를 고수할 필요가 있다. 라틴계 사람들이나 중동인들은 협상이나 대화를 시작하기 전 악수와 함께 서로를 껴안는 습관이 있는데 이는 우정과 신뢰를 상징한다.

라틴계는 '팔꿈치 문화'

대화할 때 거리는 개인에 따라서도 다르다. 사람들은 대화 시 거리를 조절함으로써 상대방과 관계를 맺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한다. 정치적 신념 때문에 다가가기를 거부한 한 정치인의 예를 보자.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다. 영웅은 범용(凡庸)의 시대에는 맞지 않아서였을까? 전쟁 후 영국인들은 보수당 대신 노동당을 선택했다. 노동당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는 기간산업 국유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하원 정회시간 때 처칠은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애틀리 총리가 일을 보는 옆자리에 가지 않고 다른 빈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다. 애틀리가 일을 보고 나오다 처칠을 보고 물었다. “내 옆자리가 비었지 않아요?” 처칠이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요. 하지만 당신은 큰 것(something big)만 보면 모두 국유화하려고 하니 겁이 나서 옆에 가겠소?”

대화 시 거리는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이자 도구다. 미국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에 따르면 사람들은 공간 영역을 네 가지로 구분해 처신한다. 친밀한 거리(0~0.5m), 개인적 거리(0.5~1.2m), 사회적 거리(1.2~3.5m), 공적 거리(3.5m 이상)다. 친밀한 거리는 엄마와 아기, 연인 사이 등 사랑을 나누거나 보호해주는 행위가 일어나는 거리다. 개인적 거리는 친구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대화하는 거리다. 사회적 거리는 직장에서 공적인 업무로 대화할 때나 사교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유지하는 거리다. 공적 거리는 대중을 상대로 연설이나 강연할 때 이용되는 거리다.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최적의 거리는 ‘고슴도치의 거리’라고 말할 수 있다. 고슴도치는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 모여 체온을 나눈다. 그러나 가시에 찔리기 때문에 너무 가까이 갈 수는 없다. 관계를 맺으면서도 상처를 주지 않는 거리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정과 신뢰의 표현으로 악수나 포옹을 하고 상대방의 등을 두드리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방의 개인적 공간을 무턱대고 침범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당신이 사귀기를 원하는 이성과 대화한다고 가정하자. 이때는 1.5m 정도 거리를 두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 관계의 진전 정도나 분위기에 따라 이 거리는 좁혀질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다가가 상대방이 자신의 개인적 영역이 침범됐다고 생각할 경우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문화가 다를 땐 '고슴도치 거리'

국가 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특히 상호신뢰가 결여된 국가들이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거리와 속도, 동맹 관계에 고도의 균형감각과 신중함이 필요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라는 영화가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스파이 교환 작전에 섭외된 변호사 제임스 도너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스파이 브릿지에서의 성공적인 포로 교환 이후 도너번은 쿠바 내 수감자들에 대한 석방 협상에도 참여했다. 교섭이 진행되던 어느 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의장이 미국·쿠바 간 외교관계 복원 가능성을 묻자 그가 답변했다. “고슴도치가 어떻게 사랑을 나누는지 아세요? 매우 조심스럽게요. 고슴도치처럼 미국과 쿠바도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겁니다.”

도너번이 말한 신중함이 부족해서였을까? 냉전의 격랑에 휩쓸려 양국은 오랫동안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했다. 1961년 국교 단절 이후 2015년 외교관계가 복원되기까지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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