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논설위원
[ 허원순 기자 ] 근래 영국의 장관급 인사가 현지 사업규모가 큰 모 한국 기업에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에도 영국 투자를 유지해 달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말이 부탁이지, 협박으로 들렸다”고 회사 관계자는 전했다. 투자 철수에 대한 걱정에서 영국 정부의 다급함이 보였다.
위기의식은 금융업에서 더할 것이다. 뉴욕과 국제금융 허브를 경쟁해 온 런던의 위상이 브렉시트와 함께 흔들린다는 보도도 숱하게 나왔다. 투자은행과 자산운용사 중에는 파리로, 더러는 프랑크푸르트로 세일즈·트레이딩 센터를 옮기겠다는 곳이 적지 않다. 프랑스는 드러내놓고 ‘탈(脫)런던’을 부추겨왔다. 금융계 거물을 만나 ‘파리 세일즈’에 나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행보도 종종 기사화됐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결정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명분이 분명했다. “영국 내정까지 시시콜콜하게 규제하는 저급한 EU의 관료 체제에서 아예 벗어나자”는 것이었지만 대가는 컸다. ‘국가 이혼’에 뒷일이 많았다. EU 내 다른 국가로의 이동이 국경선을 넘는 일이 됐고, 상품과 서비스의 교역이나 고용 문제도 복잡하게 됐다.
영국 정부는 브렉시트부(部)까지 신설하며 원만한 이혼을 꾀해 왔다. EU와의 20개월 이혼 협상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마무리 협상안이 공개되면서 영국은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최소 2020년까지 EU와의 관세동맹에 남아 EU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 특히 문제였다. “이럴 거면 브렉시트를 왜 했냐”는 반발이 나올 만했다.
지난 주까지 5명의 각료가 사표를 냈다. 의회에서는 총리 불신임이 진행돼 테리사 메이 정권도 최대 위기를 맞았다. 향후 브렉시트의 진행에 대해 네 가지 시나리오가 나오지만, 하나같이 간단하지가 않다. 이 중에는 총선과 국민투표 재실시도 있다. 메이의 보수당에는 완전결별을 주장하는 ‘하드 브렉시트파’도 적지 않아 아무런 합의도 없이 탈퇴하는 ‘노 딜 브렉시트’ 가능성도 거론된다. 반면 EU 측은 여유만만이다. 영국이 브렉시트 계획을 취소하면 얼마든지 재결합하겠다는 태도다.
브렉시트 확정 때 폭락했던 파운드화는 이번에도 급락했다. 순조롭지 못한 이혼으로 혼란이 지속되면 더 떨어진다는 경고도 나왔다. 어디나 시장의 최대 적은 불안정, 불확실, 불투명 ‘3불(不)’이다. 영국이 브렉시트의 청구서를 제대로 계산 못 했을지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려졌던 이혼의 부대비용이 드러났을 수도 있다. 개인들 이혼법정의 최대 쟁점도 친권행사 아니면 재산분할, 즉 돈 문제다.
한·미동맹 관계를 브렉시트와 한 번 비교해보면 어떨까. 종북 반미주의자는 논외로 치고, 동맹 경시론자들은 양국의 이혼이나 별거 비용을 어디까지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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