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논설위원
[ 고두현 기자 ] 수많은 인종이 모인 미국 사회를 ‘용광로(melting pot)’라고 표현한 사람은 프랑스계 미국 수필가 미셸 기욤 장 드 크레브쾨르다. 그는 18세기 후반에 “할아버지가 영국인, 할머니가 네덜란드인이고 아버지는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으며 자식 4명이 각기 다른 나라 출신과 결혼한 일가도 많다”며 “이런 개개인이 녹아 새로운 인종이 탄생한다”고 했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미국 방문 중 열차에서 실수한 뒤 “이방인이어서 …”라며 차장에게 사과하자 “우리 모두 이방인”이라는 답을 들었다는 일화도 ‘인종 용광로’인 미국의 단면을 보여준다.
지난 6일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에서 원주민 혈통 여성 두 명이 연방 하원에 진출하는 등 다양한 인종의 당선자들이 배출됐다. 첫 ‘무슬림 여성’ 하원의원도 둘이나 나왔다. 미시간주의 라시다 틀레입은 팔레스타인 이민자 출신으로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다. 미네소타주의 일한 오마르는 어린 시절 내전을 피해 케냐 난민촌에서 4년을 보낸 소말리아 출신이다.
한국계도 두 명의 연방하원 동시 입성이 유력시된다. 캘리포니아주에서 공화당 소속으로 당선이 확실시되는 영 김(한국명 김영옥)은 13세 때 한국에서 괌으로 이주한 뒤 대학 졸업 후 금융회사에서 일하다 의류업체를 운영해 온 이민자다.
뉴저지주에서 출마한 민주당 소속 앤디 김은 개표 막판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극적인 당선이 유력하다. 이민 2세대인 그는 소아마비를 겪으며 알츠하이머 연구에 몰두한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 옥스퍼드대를 다녔다. 1992년 하원에 처음 입성한 제이 김(김창준) 이후 두 명의 한국계 연방의원 탄생이라는 경사가 임박했다.
뉴욕주에서 출마한 라틴계 여성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테즈는 갓 29세가 된 최연소 의원이자 대학 무상등록금 같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앞세운 좌파 정치 신인이다. 2016년 대선 민주당 경선에 나왔던 사회주의 정치인 버니 샌더스 캠프에서 일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극단적인 성향을 지녔다. 그렇지만 유권자들은 그를 선택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도 다양한 인종이 모여 미국의 활기를 북돋우고 있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인력의 4분의 3, 신생 벤처기업 대표의 3분의 1이 아시아·중동 출신 1세대 이민자다. 각국의 우수한 인재와 문화적 다원주의, 젊은 노동인구의 유입은 오늘날의 최강대국 미국을 일군 원동력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 등 배타적인 정책을 펴는 중에도 미국인들이 ‘열린 사회’와 ‘다인종 문화’의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이번 선거는 또 한 번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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