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하다면
결과 받아들이는 게 '정의로운 사회'
'정의'의 정치적 독점과 오·남용 없어야
이학영 논설실장
[ 이학영 기자 ] ‘정의(正義)’의 뜻풀이는 간단하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에게 합당한 몫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무엇이 ‘자기에게 합당한 몫’인지에 대한 해석 논란을 남겼다. ‘정의’를 어떻게 정의(定義)해야 할 것인지는 아직도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자 존 롤스의 ‘정의론’에서부터 ‘미덕과 공동선(common goods)을 장려하는 것’이라는 공동체주의자 마이클 샌델 주장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이다.
‘정의’라는 말의 쓰임새도 철학자들의 해석만큼이나 다양하다. 미국은 ‘정의(justice)’를 법무부 명칭(department of justice)으로 사용한다. 법치(法治)가 정의의 출발점이란 의미일 것이다. 황당하게도 ‘정의’는 음침한 공간의 폭력배들에게도 애용된다. 1986년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서진룸살롱 사건의 살인범들은 법정 진술에서 “정의를 위해 살아온 만큼 후회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정치집단이 사용하는 ‘정의’는 정치적 지향점이나 의도를 포장 내지는 합리화하기 위해 동원되기 일쑤다. 1980년 12·12 쿠데타와 함께 등장한 신군부는 ‘정의사회 구현’을 집권 명분이자 구호로 삼았다. 실현 방안인 ‘사회악 일소’와 ‘사회 정화’의 방편으로 출범시킨 ‘삼청교육대’는 폭력배만이 아니라 무고한 숱한 시민의 삶을 파괴하는 참극으로 끝났다. 신군부는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며 만든 집권당(민주정의당) 이름에도 ‘정의’를 집어넣었다. ‘민주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집단의 거꾸로 작명(作名)’이라던 저잣거리의 쑥덕거림이 귀에 선하다.
‘정의’에 대한 온갖 상념이 떠오른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1일 국회 시정연설을 듣고 나서였다. “공정한 기회와 정의로운 결과가 보장되는 나라가 돼야 합니다.” 문 대통령이 확장적인 예산 편성을 통해 ‘포용국가’로 나아가겠다는 비전을 제시하며 강조한 말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 말을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정도로 자주 입에 올린다. 작년 5월10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선언한 게 시작이었다. 두 달 뒤인 작년 7월 내놓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선 “평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는 문 대통령 국정철학에서 가장 우선하는 원칙이며 새로운 정부의 핵심 가치”라고 못 박았다.
국정계획 보고서의 핵심어(語)는 ‘정의로운 대한민국’이었다. 197쪽짜리 보고서는 첫 페이지의 ‘무너진 국가·사회 체계를 정의롭게 재정립하고…’를 시작으로 곳곳에 ‘정의’를 박아 넣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비정규직 제로(0)’를 첫 번째 경제정책으로 선포한 것을 시작으로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 ‘노동 존중을 통한 소득주도 성장정책’을 강력하게 펼친 것은 ‘시대적 과제’로 규정한 정의 구현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그런 기대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청년실업률이 치솟고 자영업자들은 당장의 생계위기를 호소하면서 소득격차가 되레 확대됐다. 급기야 경제정책 수립과 집행의 ‘투톱’을 맡은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정책실장의 문책성 동반 경질이 예고되기에 이르렀다.
정권 내부에서 “이러자는 건 아니지 않았느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 경제자문 책임자인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제대로 된 근거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게 쓴소리의 골자다. 얼마 전 한 포럼에서는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는 정책은 정의가 아니다”며 문재인 정부의 ‘핵심 가치’를 건드리는 말까지 했다. “정의를 ‘결과’로 이뤄내겠다는 설계주의적 발상이 출발점에서부터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김 부의장은 돌려 말했지만, 하려는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까지 공정하다면 그에 따른 결과가 인정받고 보장돼야 자유롭고 역동적인 경쟁이 펼쳐질 수 있다. 국가가 나서서 결과를 ‘정의로운 것’으로 보정(補正)하는 사회에서 누가 피땀 흘리는 경쟁의 수고를 하려 들겠는가. ‘정의’라는 화두(話頭)를 이런 관점에서 성찰할 수는 없을까. ‘정의’라는 말의 정치적 독점만큼이나 위험한 건 오·남용이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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