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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원칙을 따르는 안티고네…민주주의는 각성한 개인에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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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22) 양심(良心)

세상을 바꾸는 개인의 힘
대중심리 이용하는 권력자에
저항하고 맞서는 개인이
사회의 진보와 행복 이끌어

집단을 대변하는 이스메네
현실을 직시하고 법령을 수용
"국가 권력에 대항할 수 없다"
언니 안티고네 설득에 나서

양심에 충실한 안티고네
스스로에 떳떳한 양심의 法이
통치자가 규정한 법보다 위대




옛 소련에서 가난한 홀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평범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1945년 포병부대에 근무하며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탈린에 대해 은유적인 용어를 사용해 비꼬았다. 그는 스탈린을 ‘가장(家長)’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코즈야인(khozain)’과 이디시어 ‘발라보스(Balabo)’란 용어를 빌려 표현했다. 이 편지가 소련 당국의 검열에 발각됐다. 그는 강제노역장에서 1945년부터 1953년까지 8년이란 긴 세월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이다. 솔제니친은 후에 이 수용소 시절 기억을 《수용소군도》(1973)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다. 그는 20세기 가장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인 삶을 경험한 정치범으로서 개인이 거대한 정치권력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물었다.

집단과 개인

솔제니친은 말한다. “용감한 개인(個人)의 단순한 발걸음은 ‘거짓’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힘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는 대중정치에 맞서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진보와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보루(堡壘)다. 문명과 문화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사상은 결국 위대한 개인의 생각과 양심의 정교한 확신에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 예수, 코페르니쿠스, 마르틴 루터, 프리드리히 니체 등과 같은 혁명가들은 새로운 세상을 개화시키는 거룩한 씨앗들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의 변화와 개혁은 집단행동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는다. 개인의 생각과 결단은 이기적이며 사회의 진보와 개선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의 일원으로 사회의 공동 목적과 이익을 위해 힘을 합칠 때 가시적인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개인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경쟁적으로 사는 것에 익숙하다면 그런 개인들이 모여 만든 집단은 더욱 위험하다. 선진적인 인간이 선진국을 만든다. 선진국은 선진적인 인간들이 많은 나라다.

문화는 그 문화를 향유하는 구성원들이 ‘투표’나 ‘청원’을 통해 결정하는 ‘평균(平均)’이 아니다. 평균은 그 구성원들이 모두 안심할 수 있는 아래를 지향하는 허상이다. 19세기 미국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1844년에 쓴 ‘정치’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은 정부가 좋은 정부입니다. (…) 정부의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처방전은 개인의 영향과 성장입니다. 개인은 정부라는 대리인을 갈아치울 수 있는 자본입니다. (…) 국가는 그런 지혜로운 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 지혜로운 사람이 국가입니다.”

20세기 가장 잔인한 독재자들, 즉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과 같은 인물들은 모두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념으로만 존재하는 국가나 당이라는 집단을 강조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아직도 집단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주적이다. 민주주의의 성공은 각성한 개인들의 숙고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을 통치하려는 욕망을 지닌 사람들은 지혜로운 개인들을 싫어한다. 그들의 권력에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에게 집단은 개성을 지니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자신의 정제되지 않는 욕망을 맹목적으로 좇는 정신적 노예들의 오합지졸이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1881~1973)는 《이론과 역사, 사회·경제적 진화에 대한 해석》(1953)이란 책에서 집단주의를 비판한다. “세상에 일관된 집단 이념은 없다. 거기에는 수많은 집단 교리만 있을 뿐이다. 이 교리들은 각자 자신들의 집단을 찬양하고 점잖은 시민들의 복종을 요구한다. 각 집단은 자신들의 우상을 숭배하고 다른 집단의 우상들에는 인정사정이 없다.”

이런 집단의 구성원들과 그 리더들이 ‘민족국가’를 만들었다. 집단 구성원들은 기꺼이 순한 양 떼를 풀이 많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목자’들의 말에 복종한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자들이 늑대가 되고, 목자들의 지팡이는 철퇴가 되고 시퍼런 이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개인’ 안티고네와 ‘집단’ 이스메네

테베의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을 견고하게 다지고 싶은 왕 크레온은 국장(國葬)이라는 의례를 통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싶었다. 그는 안티고네의 오빠 에테오클레스에게는 성대한 국장을 포고했고, 또 다른 오빠 폴리네이케스에게는 금수의 먹이가 되게 그의 시신을 길바닥에 방치하도록 ‘긴급조치’를 명령했다. 이 긴급조치에는 이를 조금이라도 어기는 자를 테베 시민들이 투석을 통해 사형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됐다.

시민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리더를 뽑기 위해 항아리에 조그만 돌을 던지는 거룩한 투표 행위가 이제 국가라는 권력이 명령한 조치를 위반하는 자에게 던지는 야만적인 투석 행위가 됐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명령이 상징하는 국가권력이 일방적으로 정한 조치가 자신의 정신세계와 부합하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그녀는 테베라는 도시의 일부분이 아니라 테베라는 거대한 구조를 지탱하는 중요한 일부다. 기원전 26세기 이집트에 세워진 쿠푸의 피라미드는 그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탱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알고 굳건하게 지키는 200만 개 이상의 거대한 돌들의 정교한 집합이다.

안티고네에게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속한 가문의 전통이 국가의 법령보다 더 중요했다. 국가권력과 조치에 순응하려는 이스메네는 그런 안티고네를 가엽고 어리석다고 여긴다. 현실을 직시하는 이스메네는 자신이 국가권력에 대항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메네는 철없는 이상주의자 안티고네에게 말한다. “도시에 금령이 내려졌는데도 오빠를 묻어주려는 거예요?”(44행)

안티고네는 그 누구도 자신의 가족을 향한 사랑과 친절을 방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방해하는 주체가 왕이든 신이든 상관없다. 안티고네의 삶을 지탱하는 문법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자비다. 그녀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는 자비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참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스메네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다. 그녀들의 가문은 그런 전통을 지킬 만큼 훌륭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세상의 웃음거리와 지탄의 대상인 오이디푸스 가문의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이스메네는 아버지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두 눈을 상하게 했는지, 그녀들의 어머니이자 언니인 이오카스테가 어떻게 자살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두 오빠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어떻게 서로를 죽였는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스메네는 자신도 다른 가족들과 같이 비참하게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티고네의 고의적인 명령 위반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여느 그리스 여인들처럼 이스메네는 말한다. “언니,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해요. 첫째, 우리는 여자들이며 남자들과 싸우도록 태어나지 않았어요. 둘째, 우리는 우리보다 더 강한 자(크레온)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번 일은 물론이고 이보다 더 괴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복종해야 해요.”(61~64행) 이스메네는 자신들을 통치하는 살아 있는 권력인 크레온에게는 복종하고, 그녀의 양심 속에 살아 있는, 보이지 않는 ‘지하에 계시는 분’ 오빠 폴리네이케스에겐 용서를 빌 것이다. 이스메네에겐 이뤄질 수 없는 일을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양심(良心)

이스메네의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말을 경청한 후 안티고네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네가 요구한 대로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아무리 그것을 원한다고 해도 나는 네 도움이 달갑지 않아. 너는 네가 좋은 대로 생각해.”

안티고네는 테베와 테베의 통치자가 규정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량한 시민이 되려는 이스메네를 나무라지 않는다. 사회는 항상 자신의 현재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그 현재에 틈을 내 미래로 확장하려는 개인을 혐오한다. 안티고네는 자신을 사회의 한계 안에서 정의한 이스메네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안티고네는 그녀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자신만의 법칙인 양심에 복종할 것이다. “나는 오빠 폴리네이케스, 나의 사랑하는 자 옆에 양심대로 ‘거룩한 범행’을 행한 자로 누울 거야.”

‘거룩한 범행’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호시아(hosia)’는 번역하기 힘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호시아는 그리스어에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법을 지키는 ‘정의’(그리스어 ‘디카이오스’)나 신들에 의해 정해진 종교적인 ‘거룩’(그리스어 ‘히에로스’)과는 구별된다. 호시아는 자신의 양심에 비춰 거리낌이 없는, 스스로에게 거룩한 양심의 법이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독립적이며 자생적인 음성인 양심에 복종하는 것이 집단의 법이라는 종교의 교리보다 위대하고 숭고하다고 확신했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양심에 복종한 위대한 사상가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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