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19) 개별 인신 지배체제
"기존 호적 모두 불태워라"
1461년 대대적 인구 전수조사
'1호=6~7개 세대의 복합체'에서
소규모 세대를 단위 호로 규정
20만호에서 130만여호로 급증
양반 겨냥한 토지 조사
토지 5결 보유하면 1명 군역
奴도 男丁으로 간주해
지배세력에 군역 부담 지워
세조 사후…좌절된 개혁
'奴·토지=男丁' 조치 취소
하층 농민에게 다시 군역 집중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라져
지배체제의 이원화
조선왕조의 토지와 인구에 대한 지배체제가 나름의 형태로 완성되는 것은 《경국대전》이 편찬되는 1460년대다. 조선왕조는 토지 지배와 인구 지배를 별개의 체제로 영위했다. 토지로부터는 조세와 공물을 수취했다. 인구로부터는 군역(軍役)을 비롯한 갖가지 역을 수취했다. 두 지배체제는 아무런 연관성이나 보완성이 없었다. 토지가 많은 사람이 역을 적게 질 수 있었고, 토지가 적은 사람이 역을 많이 질 수 있었다. 얼핏 보아 모순에 가득 찬 지배체제였다. 국가 운영을 합리적으로 설계하거나 집행할 능력이 부족해서 그랬던가. 어쨌든 부담의 불공평은 신분제의 논리로 정당화됐다. 양반은 국가의 간성(干城·방패와 성)으로 군역에서 면제돼야 한다는 명분론이었다.
이 같은 지배체제의 이원성, 그로부터 파생하는 부담의 불공평, 그것을 정당화하는 신분제는 이전의 신라·고려왕조에서는 찾을 수 없는 조선왕조 고유의 특질이다. 인근 중국사와 일본사의 어느 시대에서도 찾을 수 없는 한국사 고유의 특질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연구야말로 조선시대 연구의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한다.
정호의 해체
이전에 설명한 대로 신라와 고려의 지배체제는 일정 규모의 토지와 인구가 결합한 정호(丁戶)를 기초 단위로 했다. 어느 친족집단이 어느 들판을 공동으로 점유한 상태가 정호였다. 친족집단은 보통 8개의 소규모 세대로 이뤄진 복합체였다. 들판의 크기는 8결과 17결을 표준으로 하는 쌍봉형 분포였다. 정호는 들판의 크기에 따라 몇 개의 등급으로 나뉘었다. 고려는 그 등급을 기준으로 조세, 공물, 역을 수취했다. 정호 안에 인구가 얼마인지는 헤아리지 않았다. 토지와 인구는 대개 비례한다는 전제 위에 토지와 인구를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체제였다.
그 지배체제가 조선왕조에 들어 해체됐다. 변화의 시작은 훨씬 이른 원(元) 복속기부터였다. 조선은 토지를 5결의 크기로 일률 구획한 다음, 거기에다 정호를 대변하는 사람의 이름 대신에 천자문을 순서대로 붙였다. 구획 내의 개별 필지에 대해서는 1, 2, 3의 지번을 붙였다. 이 같은 조사방식의 변화는 연작농법의 정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휴한농법의 단계에서 토지조사는 정호가 점유하고 경작하는 범위를 주요 대상으로 했다. 그 바깥에 널린 묵은 토지는 일일이 조사하지 않았다. 마치 붕어빵틀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에 비해 조선은 진기(陳起·논밭을 묵히거나 갈거나 함) 여부를 따지지 않고 산지가 아닌 모든 토지를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고선 5결로 일률 구획하고 각 필지에 지번을 붙이니 마치 바둑판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 결과 양안(量案)이라는 조선왕조 고유의 토지대장이 만들어졌다. 대략 1460년대까지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들판을 단위로 자연스럽게 뭉쳐진 세대복합체를 기초 단위로 한 고려왕조의 지배체제가 허물어졌다.
호의 구조
한국인이 남긴 인구에 관한 수량 정보는 조선시대가 돼서야 처음으로 전한다. 1406년 전국의 인구는 18만246호에 37만365명이었다. 1432년에는 20만7526호에 74만6343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호당 3.6명이다. 이 호수와 인구수가 어떤 성질인지는 잘 알려져 있다.
호수는 군인·향리·역리 등(이하 군인으로 통칭)을 1명 배출하는 군호(軍戶)의 수를, 인구수는 군인으로 차출된 남정(男丁)의 수를 가리켰다. 남정이란 16~60세의 남자를 말한다. 1432년 전국의 인구는 대략 66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74만여 남정이 군인으로 차출돼 3.6명이 한 조로 편성됐다. 그 가운데 신체 강건하고 재주 있는 사람이 정군(正軍)으로 지정되면 나머지 2.6명은 보인(保人)으로서 그를 보조하는 관계가 당시의 호였다. 정군이 당번을 맞아 일정 기간 군영으로 나가면 보인은 식량과 의복을 공급하는 등의 뒷바라지를 했다.
1432년 전국 20만7526호가 보유한 토지는 호당 평균 8.25결이었다. 이로부터 당시까지도 고려 정호의 형태와 구조가 온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지역별 편차가 너무 심하게 벌어져 있었다. 강원도의 호당 결수는 6결에 불과한데, 전라도는 11결이나 됐다. 강원도의 군역 부담은 전라도보다 근 2배나 됐다. 전국적으로 정호의 원래 모습은 상당한 정도로 허물어진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공물이나 역을 부과하는 기준이 지역에 따라 달랐다. 어느 도에는 남정의 수를, 다른 도에서는 토지의 크기를, 또 다른 도에서는 양쪽 모두를 기준으로 했다.
일대 인구조사
세종조(1418∼1450)까지 조선왕조는 전국의 실제 인구수를 알지 못했다. 신하들은 “호적에 등록된 사람이 겨우 10의 1, 2에 불과하다”며 철저한 인구조사를 몇 차례 건의했다. 문치로 일관한 세종은 말썽 많은 인구조사에 덤벼들지 않았다. 일대 개혁은 그의 아들 세조에 의해 착수됐다. 1461년 세조는 기존의 호적을 모조리 불사른 다음, 전국의 인구수에 관한 발본적 조사를 강행했다. 모든 남정에게는 성명, 나이, 주소를 기록한 호패(戶牌)가 지급됐으며, 호패를 차지 않은 남정은 발각되는 대로 효수에 처해졌다. 호에 관해서도 소규모 세대 자체를 단위 호로 규정하고 그 전수를 조사했다.
새롭게 파악된 전국의 호수는 130만여 호나 됐다. 종래의 20만여 호가 그렇게나 급증한 것은 종래의 호가 평균적으로 6~7개 세대의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1417년에 작성된 함길도 길주의 최징이란 사람의 호적이 전한다.
호의 구성원은 호주 최징(47세), 처(41세), 장남(22세), 장녀(19세)의 직계가족과 형(51세), 4명의 자매(55, 42, 35, 33세)로 이뤄진 방계가족, 그리고 비 2명으로 도합 11명이었다. 방계가족 5명은 나이로 보아 배우자와 자녀를 둔 독자의 세대였다. 결과적으로 최징의 호는 6개의 세대로 이뤄진 복합체였다(그림 참조). 다름 아닌 고려 이래의 정호였다. 아니 1000년 전부터 개별 세대의 출현과 더불어 국가의 기초 단위로 역할해 온 공연(孔烟)이었다. 그 유구한 역사의 세대복합체가 세조의 일대 인구조사로 드디어 해체됐다. 한국 문명사에서 이보다 더 극적인 사건이 달리 있을까.
개혁과 좌절
뒤이어 세조는 전국의 토지를 대대적으로 조사했다. 통일적 기준으로 전국적 토지조사를 강행한 것도 세조가 처음이었다. 세조의 개혁은 그야말로 창업적이었다. 많은 인구와 토지를 숨기고 있던 양반관료와 지방세력은 세조의 개혁을 비난했다. 세조가 폭군이라는 평판은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다. 뒤이어 세조는 백성의 군역 부담을 고르게 하는 개혁에 착수하는데, 보법(保法)이라 했다.
개혁의 요지는 세 가지였다. 첫째, 노(奴)도 군역을 지는 남정으로 간주했다. 둘째, 5결의 토지도 1명의 남정으로 간주했다. 노비와 토지를 많이 소유한 지배세력에 군역을 많이 지움으로써 가난한 하층민을 돕자는 것이 보법 개혁이었다. 셋째, 그렇게 파악된 남정을 2명씩 묶어 1보(保)로 편성해 군역을 지는 단위로 삼았다. 부연하면 1보가 1명의 군인을 내고, 2명의 군인을 1개의 군호로 편성하고, 그중 1명이 정군으로 복무하면 나머지 1명은 보인이 되는 관계였다. 이런 원리로 세조는 전국적으로 13만5000명의 정군을 확보했다.
1468년 세조가 사망하자 그의 개혁은 하나씩 취소됐다. 맨 먼저 노에게 군역을 지우는 조치가 취소됐다. 뒤이어 5결의 토지를 1명의 남정으로 간주하는 조치도 취소됐다. 나아가 어느 호에 남정이 3명 이상이라도 1보로 편성된 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묻지 않는다는 조치가 취해졌다. 모두 많은 노비와 토지, 친족을 포섭한 지배세력의 이해에 충실한 조치였다.
16세기가 되면 2명의 남정을 1보로 편성하는 일도 중단되고 2명 각각에게 면포를 수취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그렇게 하층 농민 하나하나를 군인으로 지정하고 그로부터 군포(軍布)를 수취하는 개별 인신 지배체제가 탄생했다. 양반신분은 군역에서 거의 제외됐다. 국가의 간성임을 자부하는 양반이 군사 복무에서 면제됨을 당연시하는 특이한 체제였다. 외적이 침입하면 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원래의 양반이었다. 한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라지는 것은 이때부터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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