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논설위원
한국에서 영어 공용화를 처음 들고 나온 사람은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인 복거일 씨다. 그는 1998년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란 책에서 영어 공용화라는 화두를 던져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꽤 세월이 흘렀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그는 경제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인터넷 정보의 80~90%가 영어라는 점을 든다. 또 공식 언어든 아니든, 영어를 쓰는 인구가 전 세계에 약 10억 명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영어 사용능력이 국가와 개인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만큼 모든 국민이 어려서부터 영어를 제2공용어로 익힐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는 높아질 것이라는 견해도 덧붙인다.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도 찬성론자다. 그는 “서울 강남 초등학생의 25%가 영어 유치원 출신인데 강북은 이 비율이 1%밖에 안 된다”며 “지금처럼 영어 교육을 사교육에 맡겨두면 소득에 따라 영어 실력에 차이가 나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가 더 심해진다”고 지적한다. 그는 “네덜란드, 스위스, 핀란드, 싱가포르 등의 성공 사례를 본받자”며 영어 공용화가 됐으면 ‘싸이월드’가 지금의 ‘페이스북’이 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편다.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과거엔 주로 민족 문화, 민족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이유가 많았지만 최근엔 영어가 국가 경쟁력과 직접 관련이 없다거나 막대한 비용을 들어 반대하는 견해들이 많다. 영어 공용화의 정확한 의미를 몰라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어는 지금처럼 국어로 두고 영어는 제2의 공용어(共用語)로 병행해 쓰자는 것인데 마치 영어만이 공용어(公用語)가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대만에서도 라이칭더 행정원장이 영어 공용화 추진을 공식화하면서 논란이 불붙고 있다. 대만의 영어 공용화 논쟁은 한국과 매우 비슷하다. 오래전부터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치열한 찬반으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찬반 주장의 근거도 비슷하다. 다만 대만 정부가 이를 공식화한 것은 영어 공용화 자체보다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더 크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인에게 영어란 평생 다 못한 숙제와도 같다. “영어 하나라도 건지면 된다”는 심정에 자식을 ‘묻지마 유학’이라도 보내려는 배경이기도 하다. 영어 공용화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정착까지 부작용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어 사교육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비용과 비효율, 낭비를 감안하면 한번 추진해볼 만하지 않을까. 청년 취업의 길도 넓어지고 한국인의 노벨상 수상도 앞당겨질지 모른다. 우선 오해하기 쉬운 ‘영어 공용화’라는 말 대신 ‘영어 겸용화’로 고쳐 부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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